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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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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고문은 국회미래연구원의 공식적인 견해와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전상인] 개인이 미래다!

작성일 : 2021-04-06 작성자 : 통합 관리자

개인이 미래다!

전상인 국회미래연구원 객원필진(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사회학) 2021. 04. 06.


개인이 미래다!


전형적인 후진국에서 출발하여 우리나라만큼 단기간에 세계적인 부국 및 강국으로 성장한 나라는 유례가 없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등장한 나라로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모두 성취한 경우는 대한민국이 처음이다. 반만년 한반도 역사에서 수많은 왕조가 명멸했지만, 한민족이 이만큼 풍족하게, 자유롭게, 그리고 당당하게 살게 된 것은 불과 최근 몇십 년 동안의 일이다. 분단체제 아래에서 동시에 출발한 북한의 현실은 아예 비교할 가치조차 없다. 이러한 ‘근대화 혁명’의 성공이 무색하게도 정작 우리들 자신은 만년 ‘선진국 문턱’ 타령이다. 내부적으로도 민주주의, 경제성장, 사회통합 등에 관련하여 불안의식과 위기담론이 일상화·만성화되어 있다. 우리의 미래에 대해 우리 스스로 자신감이 없다.  


웬만한 겉보기 지표나 통계상으로는 한때 앞서가던 나라들의 모든 것을 다 추격한 듯하지만, 속으로 우리는 무언가 하나가 모자라고 어딘가 하나가 빠져있다. 그것은 바로 개인 혹은 개인주의다. 싫든 좋든 근대문명의 출발은 서구이고, 서구문명의 바탕은 개인이다. 시장경제가 그렇고 민주주의가 그러하며 복지사회도 근본 원리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개인이 아닌 집단으로 생각하고 집단으로 행동하는 경향이 일반적이다. 대중 감정에 부화(附和)하고 군중 심리에 뇌동(雷同)하는 사회, 무리 짓기에 익숙하고 편 가르기가 편한 사회, 이리저리 ‘끌리고 쏠리고 들끓는’ 것으로 그날그날 바쁘게 살아가는 사회가 우리들의 솔직한 자화상이다. 혹자는 이를 ‘다이내믹 코리아’(Dynamic Korea)로 포장하지만 차분한 일상과 예측 가능한 미래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아직도 우리는 국력과 국부, 국격에 어울리지 않는 개인의 미생(未生) 시대를 살고 있다. 


인류 역사에 있어서 개인의 탄생은 기적이라 해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개인주의는 지금의 잣대로 볼 때 너무나 당연하고 마땅한 것일지 모르나, 여기까지 오는 길은 참으로 길었고 험했다. 오랫동안 우리 인류는 가족이나 친족, 인종과 민족, 성별, 종교, 이념, 지역, 국가 등과 같은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스스로 자유롭지 않게, 그리고 남들과 평등하지 않게 살아왔다. 이 점에서는 동서양의 차이가 없다. 이런 집단주의의 구속이 깨트려 지기 시작한 것은 근대 유럽에서다. 한편으로 그것은 세속에서의 부귀공명(富貴功名)과 상관없이 궁극적으로는 신(神)과의 독대(獨對)가 예정돼있는 기독교 문화의 영향일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르네상스 이후 이성과 계몽주의 사조에 유럽이 먼저 눈을 뜬 결과일 수도 있다.  


이로써 가장 바람직스러운 인간상은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자립적으로 생활하는 것에서 찾아졌다. 타인에 대한 의존이나 타인으로부터의 강요 없이 자신의 인생을 자발적으로 선택하고 결정하고 책임지는 태도가 근대 개인주의의 최고 덕목이 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데카르트는 남이 아닌 내가 인생의 ‘주체’라고 말했고, 칸트는 투철한 ‘의지와 신념’이 곧 자기 자신이라 생각했다. 헤겔에 의하면 각자는 스스로 ‘역사’가 되어야 하고, 쇼펜하우어는 세상에 ‘고독’하게 맞서는 개인을, 그리고 니체는 세상과 ‘투쟁’하는 개인을 강조했다. 이러한 근대 서구문명의 새로운 인간관이 빚어낸 사회제도가 바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복지국가 등이다.  


말하자면 근대적 인간관이 근대적 사회제도를 생산하고, 근대적 사회제도는 다시 근대적 인간관을 재생산했다. 곧, 형식상 사회제도와 내용상 사회심리가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의 관계처럼 하나로 결합한 것이다. “나는 외톨이가 되고 싶지는 않지만, 사람들이 나를 혼자 내버려 뒀으면 좋겠다.” (I don’t want to be alone, I want to be left alone) - 이는 세계적인 영화배우 오드리 햅번이 한 말인데, 선진국 시민들의 독립심과 주체성을 핵심적으로 잘 보여준다. 집단주의에 익숙한 우리는 나 홀로 상태를 무섭고 불안하게 느끼는 데 비해 서구인들은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가 많다. 이래서 저명한 여성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는 이렇게 일갈했다. “고독(solitude)은 외로움(loneliness)이 아니다.” 


민주주의의 본질은 정치적 자기 결정권이다. 자유롭게 정치에 참여하고 평등하게 권리를 공유하는 정치체제인 것이다. 시장경제란 기회균등의 원리에 입각하여 경제활동의 자유 및 사유재산권을 보장하는 제도다. 물론 자유주의와 시장주의에는 근본적인 함정이 있는 게 사실이다. 불평등과 갈등을 초래하여 사회공동체를 해칠 위험성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공동체 복지국가론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공동체를 보호하고 유지할 필요성을 인정하고 이에 소요되는 손실과 희생을 수용하는 것이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발적이고도 적극적인 선택이라는 사실이다. 나 혼자 잘 먹고 잘사는 게 아니라 남들과 더불어 사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이익으로 돌아온다고 믿는 것이다. 공동선이란 강압이나 통제, 의무의 결과가 아니라 또 다른 의미의 개인주의일 뿐이다. 개인과 공동체가 조화롭게 양립하는 개념이 바로 공화주의이다.  


이에 비해 작금의 우리나라에는 민주주의의 토대인 개인의 자유가 잘 보이지 않는다. 정치인이나 일반 국민 모두 민심에 휘둘리고 여론에 흔들리기 일쑤다. 진영논리에 묻히거나 당심(黨心) 혹은 당론(黨論)에 갇히는 일도 다반사다. 대화나 토론 대신 깃발을 따라다니거나 플래카드를 앞세우는 집단주의가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걸고 기승을 부리고 있다. 또한, 자유로운 시장경제의 약점과 폐해를 과장하여 규제를 만병통치약으로 생각하는 분위기가 만연되어 있다. 자본주의 특유의 활력과 동력을 은폐하거나 간과하는 것이다. 그 결과, 시장경제가 발달할수록 약육강식 대신 사회적 협동을 위한 이타적 행동이 오히려 늘어나는 세상의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지금처럼 국가‘정책’이나 사회‘윤리’를 통해 공동체를 만드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복지국가라는 미명 하에 점점 더 심화되는 포퓰리즘은 개인의 자립심을 꺾을 뿐 아니라 주제적 인간으로서의 자긍심마저 황폐화시킬 뿐이다. 선진국에서 하는 것처럼 누구나 일을 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고, 벌이가 생기면 최소한의 세금이라도 내게 하는 것이 진정한 복지국가의 힘이다. 


건강한 개인주의에 기반하지 않은 민주주의나 시장경제, 복지사회는 결국 사상누각(沙上樓閣)으로 그칠 공산이 높다. 법적·신분적으로 볼 때 우리나라가 개인의 탄생을 경험하기 시작한 지 길게는 백여 년, 짧게는 수십 년 되었다. 양천(良賤)의 구분이 역사적 유물로 사라졌을 뿐 아니라 법 앞에서의 만인평등은 이제 삼척동자도 아는 상식이다. 하지만 사회·문화적으로 우리는 아직도 개인이 제대로 태어나지 않은 상태다. 바로 이 점이 선진국 진입과 선진국 문턱 사이의 보이지 않는, 그러나 거대한 차이가 아닐까 싶다. 지금 현재 온 세계가 코로나 팬데믹의 늪에 빠져있는 와중에서도 누군가는 개인의 자유를 말하고, 누군가는 프라이버시 보장과 인권보호를 외치는 전통이 서구 선진국가들에게는 여전히 강하다. 당장의 전염병 대처도 중요하지만 국가주의, 집단주의, 공동체주의가 초래할 수 있는 장기적 부작용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주의의 종균(種菌)을 살리고 키우는 일이, 코로나 세균을 막는 것 못지않게, 혹은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고 인식하는 것이 선진국의 숨은 저력이다. 


물론 우리 입장에서 서구발(發) 근대화, 서구식(式) 선진화가 아닌 대안적 경로와 미래를 꿈꿀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왜, 그리고 언제까지 그들을 따라가야만 하는가를 질문하는 일종의 문명 경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공화주의 속에 담긴 인류 보편적 가치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다. 무엇보다 고지가 바로 저기인데, 지금까지 경제발전과 민주주의, 세계화를 위해 노력해 왔던 우리들의 수고와 역정이 너무 아깝지 않은가. 그러므로 지금은 과도한 집단주의를 버리고 개인이라는 사회적 마음의 근육을 만들고 키울 때다. 이를 통해 우리가 이룩한 근대화의 외형적 기적을 내면적으로 최종 완성할 때다. 새로운 문명을 찾아 나서는 대장정은 우리의 그다음 숙제이자 과제다.  


전상인


(현)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학사 및 석사
미국 브라운대학 사회학 석사 및 박사
(전) 한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전) 미국 워싱턴주립대 방문교수
(전) 일본 히도츠바시대 방문교수
(전) 한국미래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