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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칼럼

대한민국의 미래를 예측하고 대응전략을 마련하는 외부 전문가의 기고문입니다
(본 기고문은 국회미래연구원의 공식적인 견해와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곽노필] 신뢰는 받는 게 아니라 주는 것이다

작성일 : 2021-06-30 작성자 : 통합 관리자

신뢰는 받는 게 아니라 주는 것이다


세일="자동화로 많은 이가 일자리를 잃고 있다. 경제가 성장하는 한, 일자리가 창출되는 건 인정한다. 그러나 경제 성장은 기술이 만드는 게 아니다. 전쟁과 제국주의, 비대한 정부, 자원 착취, 생태 고갈, 소비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기술 자체는 일자리를 빼앗는다."

켈리="컴퓨터로 직업을 얻는 방법을 배우고, 일자리 상실보다 더 많은 일자리를 컴퓨터와 기술이 창출한다. 지난 100년간 미국의 수억개 일자리는 농업이 아니라 산업이 만들어냈다. 일자리의 질은 중요하다. 그러나 정말 비인간적인 것은 인간이 직접 천을 짜는 것이다. 기계는 인간보다 더 좋은 천을 만들 수 있다."

세일="기술의 요체는 비용을 절감하는 것이다. 품질이 아니라 수량이 핵심이다."

켈리="아니다. 기술의 요체는 더 좋고 다양한 제품을 만드는 것이다. 단순히 대량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는 만들 수 없는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게 기술이다."

세일="기술의 특성은 더 빠른 속도로 자원을 사용하는 것이다. 기술은 우리의 이익을 위해 자연을 지배하고 착취한다."

켈리="그렇지 않다. 컴퓨터 기술은 오히려 물질 자원을 덜 사용해 자연에 미치는 영향을 줄인다. 기술의 목적은 인간의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책을 쓰고 영화를 만들고 음악을 만들게 하는 것, 그것이 기술의 목적이다."

세일="성공적인 인간 문화의 척도는 자연과 조화롭게 존재하는 것이다."

켈리="그것만으론 불충분하다. 그건 기본적으로 동물의 존재 방식이다. 우리에겐 가고 싶은 곳에 대한 꿈이 있다. 이것이 동물로서의 존재를 넘어서게 하는 것이다."


21세기를 목전에 둔 1995년 미국에서 현대 과학기술 문명의 본질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다. 디지털기술 잡지 <와이어드>의 창립 편집장 케빈 켈리와 네오러다이트 운동에 앞장선 반문명 이론가 커크패트릭 세일의 논쟁이다.

위의 설전은 그해 6월호 <와이어드>에 실린 인터뷰 중 흥미로운 몇 대목을 고른 것이다(명확한 의사 전달을 위해 말뜻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문장을 수정했다.)

“문명은 안으로는 억압, 밖으로는 정복으로 시작한다”는 말이 시사하듯, 문명의 기원은 욕망 충족에 있다. 문명의 발생 시점부터 욕망을 충족한 쪽과 그렇지 못한 쪽, 문명의 빛을 보는 쪽과 그림자를 보는 쪽이 서로 대립했을 것이다. 문명의 사회적 속성이다. 코로나19가 우리의 일상을 멈춰세우고,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줬다. 그 가운데 하나가 코로나19라는 위기를 문명 차원에서 들여다보게 해준 것이다. 많은 이들이 코로나19를 문명 위기의 징후라는 관점에서 보기 시작했다. 인간의 과학기술 문명과 자연 파괴, 기후 위기, 인수공통 전염병 문제를 연결해서 보게 됐다. 21세기 들어 부쩍 잦아진 이상기후와 사스, 메르스, 코로나19로 이어진 일련의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병 발생이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문명의 긍정적 역할을 강조한 켈리는 과학자의 책무를, 문명의 그림자를 먼저 들여다본 세일은 지도자의 책무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해준다. 과학기술자는 문명의 씨앗을 틔웠고, 지도자는 그 씨앗을 키우고 관리하는 일을 맡아왔다. 그래서 위기의 시대엔 지도자와 과학자의 역할이 더 커진다. 이 논쟁이 더욱 관심을 끈 건 이색 내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25년 후인 2020년에 문명이 붕괴하는지 보자며 1천달러를 걸었다. 문명 붕괴를 주장한 세일이 평가 지표로 세 가지를 제시했다. 첫째는 환경 재앙, 둘째는 경제 붕괴, 셋째는 빈부격차 확대다. 문명은 붕괴하지 않았으니 내기의 승자는 켈리였다. 그런데 판정관을 맡은 사람은 켈리의 손을 높이 치켜들지 않았다. 경제 붕괴 문제에선 켈리가 이겼지만, 환경 재앙은 세일의 예측이 맞았고, 빈부 격차는 거의 막상막하였다고 평가했다. 판정관을 가장 고민에 빠뜨린 게 바로 이 문명이 낳은 불평등의 문제다.


불평등이 무서운 건 사회의 응집력을 와해시키기 때문이다. 그 파괴력의 원천은 공동체 구성원들간에 쌓이는 불신의 벽이다. 그 중심엔 계층간 이해관계를 적절히 중재하거나 공정하게 조정해야 할 정부와 엘리트층에 대한 실망감이 자리잡고 있다. 얼마전 공개된 미국 국가정보위원회의 `글로벌 트렌드 2040' 보고서는 불신이 초래할 수 있는 섬뜩한 연쇄사슬을 펼쳐 보였다.


불신이 팽배한 사회에서 사람들이 믿을 곳은 관심사와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이다. 인종이나 종교, 문화가 같은 사람, 자신이 잘 알고 자신과 생각이 비슷한 사람을 만나 위안과 힘을 얻으려 한다. 그런 사람들을 쉽게 찾을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소셜미디어다. 소셜미디어에선 갖가지 정체성을 내건 그룹들이 둥지를 틀고,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 소셜미디어 속에서 사람들은 자기 생각에 더 확신을 갖고, 그룹간 배타성은 더 강해진다. 그룹 네트워크는 곧잘 국경도 넘어선다. 디지털과 세계화 영향이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저신뢰 사회의 특성으로 가족주의 또는 연고주의를 꼽았다. 그가 저신뢰 사회의 전형으로 중국과 한국을, 고신뢰 사회의 모범으로 독일과 일본을 꼽은 데는 동의할 수 없지만, 그가 지적한 연고주의의 폐단은 설득력이 있다. 소셜미디어는 디지털 연고주의의 현장을 보는 듯하다. 끼리끼리 문화는 갈등을 더 키운다. 공동체에선 타협과 절충이 중요한데, 오히려 사회를 정반대 방향으로 이끈다. 그러나 신뢰를 받지 못하는 지도층은 이를 조정할 힘이 없다. 그러는 사이에 승자와 패자의 골은 더 깊어진다.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수 없게 하는 디지털 기술은 사태를 더 악화시킨다. 상황을 타개할 일차적 책임은 사회 또는 국가 공동체 운영의 책임을 지고 있는 정부와 정치 지도자, 공공기관에 있다. 이들의 신뢰가 회복돼야 미래를 향한 건강한 담론 형성과 토론, 그리고 협력이 시작될 수 있다.


어떻게 신뢰를 회복할까? 엘리트 집단이 솔선수범, 청렴, 공정, 투명 등 전통적 윤리와 가치로 무장하면 될까? 물론 이런 것들이 불신을 해소하는 데 필요한 요소임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갈라진 신뢰의 틈을 메꾸기에는 부족하다. 갈수록 복잡해지는 사회집단간 이해관계, 더 분화해가는 가치관, 가속하는 기술 발전 등 급변하는 사회 환경도 껴안을 수 있어야 한다. "한 학기만에 세대가 바뀐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가치관이 빠르게 변화하는 시기에 맞는 행동 규범을 습득해야 한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지도자들이 시민들로부터 신뢰를 받도록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못잖게 중요한 것은 지도자들이 시민들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지금을 위기의 시대가 아니라 전환의 시대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코로나는 문명 위기의 징후가 아니라 지구를 갉아먹는 화석연료 문명에서, 지구를 보존하는 새로운 문명으로 넘어가는 갈림길에 섰음을 알려주는 징표로 볼 수 있다. 소셜미디어를 휘젓고 다니는 숱한 정체성 집단의 등장도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가 없다. 사회를 이끄는 입장에선 이런 집단들이 불안한 미래의 씨앗으로 비칠 것이다. 하지만 이는 가부장제도, 학벌구조, 장유유서 등 기존 시스템 안에서 억눌리고 인정받지 못했던 가치들이 제 목소리를 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요즘 극성을 부리는 암호화폐는 또 어떤가? 금융위기를 초래해 놓고 서민층만 죽을 맛을 보게 한 기존 규범에 대한 불신이 싹틔우는 새로운 규범은 아닌가? 기존 경제관으로 보면 질서를 교란시키는 행위이지만, 그동안 기득권층에만 유리하게 작용했던 구조를 뜯어고쳐 판을 새로 짜려는 창조적 용틀임일 수 있다는 데까지 생각을 펼칠 줄 알아야 한다.


전환의 시대에서 방향키를 쥐고 있는, 아니 쥐어야 할 그룹은 미래세대다. 불과 몇년 전만 해도 청소년 기후운동가 하면 스웨덴의 그레타 툰베리가 독보적이었다. 지금은 세계 각국에서 현지판 툰베리들이 급속도로 불어나고 있다. 독일에서 녹색당 지지율이 1위에 오른 것은 미래세대의 영향력이 급속히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들을 믿고 이들의 말을 경청하며 이들의 입장에서 발상하고 아이디어를 모으는 것이야말로 전환의 시대 지도층에게 주어진 임무다. 기성세대에게 번영의 지지대 역할을 했던 가치들은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전환의 시대엔 굴레로 작용하는 것들이 많다. 그 굴레를 벗어던지고, 새로운 가치의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는 미래세대 속으로 들어가 배워야 한다.


사회적 신뢰를 회복하는 지름길은 신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신뢰를 주는 것이다. 문제의 해법은 오히려 평범한 데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남을 믿지 못하는데 남이 나를 믿어줄까. 기성세대와 엘리트층이 먼저 미래세대와 시민들을 신뢰해야 사회적 신뢰가 회복될 수 있다. 밝고 건강한 미래를 향한 선순환은 여기서부터 물꼬가 트일 것이다. 신뢰를 줘야 신뢰가 돌아온다.


곽노필

국회미래연구원 객원필진
한겨레신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