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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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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고문은 국회미래연구원의 공식적인 견해와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박상훈] 대통령제, 이대로는 안 된다고 보는 이유

작성일 : 2021-06-23 작성자 : 통합 관리자


대통령제, 이대로는 안 된다고 보는 이유



1.

내년이면 민주화 35년째를 맞이하게 되지만, 정치는 좋아지기보다 나빠졌다. 필자는 18대 국회가 전환기였다고 본다. 역설적이게도 2007년 12월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48.7%)가 정동영 후보(26.2%)를 득표율 22.6% 차이로 압승하고, 2008년 4월 총선에서 제1야당이 81석에 불과할 정도로 집권당이 압승한 상황에서 나빠지기 시작했다. 집권세력이 이른바 ‘입법 전쟁’을 통해 자신들이 원하는 쟁점 법안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것, 거기서부터 비극은 비롯되었다고 본다.


야당과 협력해야 할 유인이 사라지자 정치는 집권당의 일방적 국회 운영과 야당의 결사 항전으로 단순화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정상적 국회 기능이 실종되자 그 자리를 법안 경쟁이 대신했다는 사실이다. 여야 격전이 벌어진 18대 국회는 8개월여 만에 17대 국회 전체 법안 발의 건수(6,387건)의 절반 이상(3,312건)을 쏟아냈다. 이렇게 해서 ‘법안 폭증’과 ‘정치 실종’이 병존하는 한국적 의회정치의 새로운 양상이 자리를 잡았다. 다른 나라의 사례에서처럼 입법 실적으로 정치의 성과를 분석하는 것은 적어도 한국 정치에서는 큰 의미가 없게 되었다.


한국 정치의 전형적인 특징은 - 정당 운영이든 입법이든 정책 결정이든 - 공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의 대부분이 대통령을 둘러싸고 전개된다는 사실에 있다. 정당은 친이, 친박, 친문처럼 대통령 개인의 성을 따라 불리는 세력들이 주도한다. 국회도 마찬가지다. ‘청와대 관심법안’, ‘대통령 공약 사안’이라고 불리는 법안이나 의제에 따라 여야가 사활적 대결을 벌인다. 적대적 공생의 양극화 정치라 해야 할 정도다.


혹자는 이를 ‘3김정치’의 유산이라고 말할지 모르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1990년의 3당합당, 1997년 DJP연합에서 보듯 3김정치는 연합과 타협, 협상이 더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청와대와 내각 구성 역시 여러 세력의 연합체제를 특징으로 했다. 이런 특징은 노무현 행정부 시기에도 유지되었고, 서구식 연합정치를 우리 정치에서도 구현하고 싶다는 의지를 노 대통령은 여러 차례 피력했다. 이런 추세에서 보면 18대 국회는 초반부터 연합과 조정의 정치 기반을 없애버리는 전환점의 역할을 했다.


정치가 의회나 정당이 아닌 대통령 당파에 의해 압도되면서 정견이나 이념, 신념의 가치는 나타날 수 없었다. 정책 논쟁이든 제도 논쟁이든 어떤 쪽이 당파적 영향력 확대에 유리한지에 대한 판단이 모든 결정을 압도했다. 권력의 크기는 능력도 대표성도 아닌 대통령과의 거리에 의해 배분되었다. 어느 정권이든 집권 초에는 전직 대통령과 현직 대통령의 싸움이 지배한다. 시간이 지나면 현직 대통령과 차기 대통령의 싸움이 정치를 지배한다. 이 패턴은 늘 반복된다.


2012년 여야 온건파들이 주도해 만든 국회선진화법이나, 2016년 총선이 만들어낸 다당제 국회, 진보-보수를 아우르는 ‘사회적 대연정’ 같았던 촛불집회에도 불구하고 이 패턴은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20대 국회 후반기와 21대 국회에서 대통령 중심의 권력 투쟁이 정치를 지배하는 패턴은 더 확대된 형태로 나타났다. 국회나 정당은 물론 여론 공론장을 지배하는 것도 박사모나 문파(빠)처럼 열성 지지자 집단들이다. 이들이 여론을 주도함에 따라 독립 언론이라고 불릴 만한 매체도 점차 사라지고 있다. 방송도 다르지 않다. 공중파 방송도 넓게 보면 종편으로 불리는 권력적 관점에 압도되는 방향으로 변했다.


정당정치도, 의회정치도 아닌 대통령직을 둘러싼 정치가 곧 한국 정치다. 국가 권력으로부터 자율적인 언론도, 시민사회도 없다. 의회정치나 정당정치라는 것도 대통령 권력의 종속변수 내지 부록(appendix)에 불과한 모습이다. 대통령제 본래의 문제일까? 아니면 대통령제 고유의 문제가 아닌, 새로 만들어진 문제일까? 그것도 아니면 한국식 대통령제에서 비롯된 문제일까?


2.

대통령제는 지금으로부터 240여 년 전 미국인들에 의해 발명되었다. 인간의 역사에서 대통령제 민주주의는 그때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크게 보면 왕도 귀족도 없었던 미국이 헌법 제정을 통해 정부를 만들게 되면서 유럽과는 다른 정치체제를 구상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지만, 자세히 보면 여러 우연적인 요소들이 대통령제가 만들어지는 데 기여했다.


1787년 여름, 필라델피아에서는 연방정부 수립을 위한 헌법제정회의가 4달 가까이 열렸다. 각 주 대표자들은 13개 주의 느슨한 ‘연합 회의’를 넘어 하나의 ‘연방 정부’로 나아가고자 했다. 이 정부는 공화정이어야 했다. 왕정이나 귀족정을 내심 생각했던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런 의제가 제기될 상황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어떤 공화정이냐에 있었다. 헌법제정회의 위원들이 공유했던 목표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는 민중의 직접적 요구로부터 대표(의원)의 독립성을 높이는 동시에 권력분립을 통해 입법부로부터 행정부와 사법부의 자율성을 높이는 일이었다. 이는 연방 헌법 제1조를 통해 확고하게 구현되었고, 그 결과 미국은 매우 독립적이고 강한 의회제를 갖게 되었다. 둘째는 안정되고 효과적인 행정부를 만들어야 하는 과제였다. 독립혁명은 영국으로부터 미국을 독립시킨 게 아니라 각 주를 독립시켰다. 13개 독립 주들의 협력은 쉽지 않았다. 전쟁 당시 빌린 부채를 상환하기 위해 각 주가 내야 하는 분담금은 걷히지 않았다. 인접한 주들 사이의 통상과 관세 문제를 둘러싼 갈등도 컸다. 새로 획득한 서부 영토의 소유권 갈등, 주가 가진 화폐발행권과 해군 통제권을 둘러싼 갈등 때문에도 안정된 행정부의 필요는 절박했다.


문제는 세 번째 목표였다. 그것은 효과적이고 안정된 행정부를 갖되 행정 수반은 대중의 직접 투표로 선출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대통령을 의회에서 선출하는 안(버지니아 안)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대로였다면 미국은 유럽의 의회중심제, 특히 국왕이 없는 내각제와 다르지 않은 정부 형태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헌법제정회의 막바지에 재논의가 이루어졌다. 의회가 대통령을 선출하게 되면 대통령의 권위가 설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행정 수반의 영향력을 강하게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당연히 대중의 직접 투표로 대통령을 선발하는 것이다. 하지만 헌법제정회의 위원들은 대중의 직접적인 정치 개입을 두려워했다. 독립혁명 이후 등장한 13개 주의 연합 체제 하에서 각 주의 통치 집단을 경악하게 한 것은 사회 하층들의 불만과 반란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대중의 요구가 행정 수반 선출 과정에서 직접 표출되지 않게 하는 것, 요즘 식으로 말하면 포퓰리즘이 안 되게 해야 한다는 것, 이에 대한 헌법제정회의 위원들의 공감은 컸다. 그 결과 주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 선발 방식에는 합의가 쉽게 이루어졌다. 그래도 갈등과 논란은 있었다. 그것은 행정 수반 선출방법이 인구가 많은 큰 주에 유리한지 아니면 인구가 적은 작은 주에 유리한지를 둘러싼 문제 때문이었다.


큰 주는 인구비례로 선거인단을 뽑는 방식을 원했다. 작은 주들은 그럴 경우 인구가 많은 큰 주에서 대통령직을 독점할까 두려워했다. 타협은 의외의 지점에서 이루어졌다. 만약 각 주 선거인단의 결정으로 과반수 후보가 나오지 않게 되면, 그때는 의회(하원)에서 각 주가 동등한 1표를 행사해 결정하기로 한 것이다. 당시에는 선거인단의 결정으로 과반수 후보가 나오지 않을 거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그렇게 되면 인구의 크기와 상관없이 각 주가 동등한 1표를 행사해 행정 수반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 작은 주가 원하는 바를 얻은 것 같았다. 실제는 어땠을까? 선거인단 투표에서 과반수 후보가 안 나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


대통령 선출방식에 대한 합의는 이루어졌지만 그래도 불안과 두려움이 존재했다. 당시 누구도 대통령제 정부가 어떻게 발전할 것인지에 대해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영국식 입헌군주제 내지 선출된 군주정으로 가는 것은 아닌지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 때문에 헌법제정위원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았던 벤저민 프랭클린은 대통령을 3인 이상 두자고 제안했다. 핑크니 위원은 단임제를 제안했다. 이런 혼란이 오래 가지 않은 것은 조지 워싱턴이라는 “개인에 대한 신뢰” 때문이었다. 초대 대통령을 두고 여러 후보가 각축하는 상황이었다면 아마도 대통령 선출방식에 합의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는 초대 대통령으로 조지 워싱턴이 아닌 다른 사람은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조지 워싱턴이라면...” 하는 가정이 많은 의구심을 줄여주었다.


조지 워싱턴은 독립전쟁의 영웅으로서 최고의 존경과 권위를 인정받고 있었다. 원했다면 왕도 될 수 있는 정도였지만, 군주정이나 귀족정에 대해 매우 강한 거부감을 보였던 사람이다. 그는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 아무런 야심 없이 고향으로 돌아갔다. 유산을 물려줄 자식이 없어서 권력을 남용하거나 부패를 저지를 유인도 없었다. 헌법제정회의 의장을 맡는 과정에서 그가 보여준 “무언의 통합자” 역할도 많은 이들에게 신뢰감을 주었다. 누가 보더라도 권력에 욕심이 없었던 사람이었다. 실제로 그는 대통령으로서 그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았다. 초대 대통령으로 공직의 경력을 마치려 했다. 첫 임기가 끝날 즈음 많은 이들이 아직 물러날 때가 아니라고 종용해서 재선 대통령직을 수락했지만, 그 이상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선을 끝으로 본인의 바람대로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마쳤다. 대통령 중임제가 미국 정치의 보이지 않는 전통이 된 것은 “조지 워싱턴조차” 재선 이상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초대 대통령으로서 조지 워싱턴이 보였던 ‘권력의 절제’는 대통령제가 현대 민주 정부의 한 유형으로 자리잡게 한 원동력이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대통령제가 240년을 견뎌낼 수 있었을지는 알 수 없다. 워싱턴은 대통령직을 이용해 자신의 권력이나 파벌을 키우지 않았다. 그는 별도의 비서 권력을 만들지 않았다. 알렉산더 해밀턴과 토머스 제퍼슨 등 주요 정파의 경쟁자들을 장관으로 앉혔다. 이 두 사람의 직위는 “Secretary of State(국무장관)”, “Secretary of the Treasury(재무장관)”이었다. 명칭은 비서(Secretary)였지만 대통령 개인을 위한 스태프(staff)가 아니라 독립된 내각을 이끄는 부처의 수반들이었다. 그 뒤 다른 대통령들도 이 전통을 따랐다. 토머스 제퍼슨은 대통령으로 취임한 뒤 전령 1명과 개인 비서 1명을 두었다. 비용은 사비로 지출했다. 그 뒤에도 대통령들은 내각과 부처 장관들과 일을 했지, 별도의 비서 조직을 두고 일하지 않았다.


미국은 언제부터 대통령이 공식 비서를 두었고, 또 그 비용을 위해 예산을 배정받을 수 있었을까? 최초로 비서 임용이 가능했던 것은 1857년이었다. 연방정부 수립 이후 거의 60년이 다 되어서야 비로소 의회는 대통령 비서를 위한 예산을 처음으로 세워주었다. 얼마였을까? 겨우 1명을 고용할 수 있는 2천5백 달러였다. 이 숫자가 한 명에서 3명으로 늘어나는 데는 다시 20년이 더 걸렸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백악관의 대통령 수석보좌관(the president’s chief aide) 제도는 언제 시작되었을까? 1900년이다. 이때도 2명의 비서관과 2명의 행정 직원, 1명의 속기사와 7명의 추가 직원이 다였다. 대통령제가 처음 시작된 이래 100년 이상을 이렇게 권력을 절제해 운영하지 않았더라면 대통령제는 안착하지 못했을 것이다.


3.

근대 공화정의 이상은 “시민에게는 자유를! 정부는 책임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통치자의 자유가 아닌 시민의 자유를 구현하고자 한 것이야말로 공화정의 흔들릴 수 없는 원칙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대통령들은 자신들의 자유를 위해 시민들의 추종을 바라고 조직하고 동원하는 일에 몰두한다. 누구도 도전할 수 없는 최고의 권력이 되고자 하는 ‘제왕적 대통령의 욕구’도 절제하지 못한다. 포퓰리즘을 억제하고 군주정이 안 되도록 하려는 게 대통령제였는데, 정반대 상황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 대통령제가 처음 시작될 때 공화정의 원칙은 확고했다. 그 원칙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장관과 내각이 추밀원(Privy Council)처럼 운영될 수 없다는 원칙이고, 둘째는 대통령은 자신을 위한 근위병 기구(Praetorian Authorities)를 둘 수 없다는 원칙이었다. 추밀원과 근위병 조직은 국왕의 요구를 집행하는 기관으로 자율성이 없다. 국왕의 요구를 처리하는 역할을 하면서 통치자의 의중을 살피고 그의 구두 지시만으로 일을 진행해야 했다. 이 말은 공식 문서와 서면 제출의 의무를 지지 않는다는 것을 뜻했다.


미국 헌법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모든 공적 행위는 문서를 남겨야 한다고 명시했다. 나아가 의회에 보고의 의무를 지게 했다. 대표적인 것이 미국 헌법 제1조 2항 3절로, “대통령은 수시로(from time to time) 의회에 연방의 상황(state of the union)에 대한 보고를 해야 한다.”는 조항이다. 이를 ‘시정 연설’이라고 옮기면 될 일을, 우리 언론들은 “대통령의 연두교서”라고 할 때가 많다. 교서(敎書)란 국왕이 발표하는 문서를 가리키는데, 무의식적으로 대통령제를 군주정에 가까운 것으로 이해하는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이런 마음 상태는 정당들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우리 정당들은 야당일 때는 국회의 역할과 책임총리를 강조한다. 집권하면 달라진다. 총리 국회 추천제는 대통령제와 충돌한다고 반대한다. 인사청문회 무용론에 가까운 주장도 서슴없이 한다. 대통령들의 변신은 더 놀랍다. 야당 후보 시절에는 의회 민주주의를 중시하고 대통령제의 문제를 지적한다. 대통령이 되면 달라진다. “내각제 개헌 합의”를 하고도 대통령이 되어서는 완전히 다른 태도를 보이는 것은 물론, 이제는 대통령 단임제 때문에 문제라거나, 최소한 한 번 이상은 연임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2012년 7월 22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야당 후보는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개헌을 연구해야 한다는 전제하에 말한다면, 대통령제보다는 내각책임제가 훨씬 좋은 제도다. 세계적 대세로 보더라도 민주주의가 발전된 대부분 나라들이 내각책임제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2017년 대통령으로 취임한 뒤에는 대통령 중임제 개헌을 내세웠다.


청와대 대통령 비서 권력의 과도함도 큰 문제다. 그들은 대통령을 곧 국가와 동일시하는 “대통령-국가주의”를 꾸준히 발전시켰다. 국가를 대통령으로 의인화하는 표현이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된다. 미국에서도 “오바마 행정부(Obama Administration)”나 “트럼프 행정부(Trump Administration)라고 부르며 대통령은 정부의 세 부처 가운데 한 부처를 책임진다는 의미의 표현이 사용된다. 반면 우리는 ”박근혜정부“, ”문재인정부“라고 부른다. 세 권력 부서 가운데 으뜸은 입법부가 아닌 대통령이라는 무의식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대통령 마음대로” 나라를 이끌 수 있게 해야 하고 이를 제어하려는 국회나 야당, 비판언론은 청산되어야 할 적폐로 주장될 때도 있다.


근대 시민혁명은 모두 의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의회 민주주의가 아닌 민주주의는 없다. 반면 대통령제는 그렇지 않다. 대통령이 없는 민주주의 국가는 아주 많다. 시민의 적법한 대표가 시민 모두에게 구속력을 가진 법을 만든다는 것이야말로 현대 민주주의의 중심 원리가 아닐 수 없다. 의회와 민주주의의 관계는 필연적이지만, 대통령과 민주주의의 관계는 그렇지가 않다.


앞서 살펴보았듯, 대통령제 민주주의가 처음 인간의 역사에 등장할 때부터 확고했던 통치 규범은 의회가 중심이 되는 정부 운영에 있었다. 대통령의 역할 규범에 있어서도 군주정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에 있었다. 의회는 대통령을 위한 하위 기구가 아니며, 내각과 부처는 추밀원이 아니다. 대통령비서실이 근위병 조직이 되어서도 안 되며, 더군다나 ‘비서실 정부’라는 말이 성립할 수 없듯이 ‘청와대 정부’라고 불리는 일도 없어야 한다. 대통령제는 이런 문제의식에서 시작된 제도인데, 오늘의 현실은 거기로부터 너무 멀리 와 버렸다.


4.

대통령제의 원형이라 할 미국식 대통령제의 가장 큰 특징은 입법권과 행정권의 엄격한 분리에 있다. 행정부는 입법권이 없다. 행정부나 내각에는 의원이 없다. 행정부에 대한 입법부의 견제는 강하다. 미국식 대통령제에서 의회는 매우 강하다. 의회는 법안 발의와 심의, 가결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독점한다. 의회의 의제 작성 권한(agenda setting power)은 세계 최고다. 의회중심제 국가보다 강하면 강하지, 약하지 않다. 예산 작성권도 의회가 갖는다. 이른바 ‘대표 없이 과세 없다.’는 확고한 원칙이 지켜지는 의회제다. 예산안 처리가 무산되면 행정부는 일시적으로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 이른바 셧다운(Shutdown)’이다. 전기, 수도, 소방 같은 일상 업무는 물론 국방과 치안, 교정 같은 업무도 중단된다.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 국회가 갖는 재정 관련 권한이라고는 예결산 심사라고 하는 지극히 사후적이고 제한적인 역할밖에 없다. 입법권 역시 행정부와 관료들의 권한이 훨씬 더 강하다. 그나마 국정 감사나 위원회 현안 질의 등의 방법으로 행정부와 대통령의 독주체제를 향해 가끔 화내고 소리 질러 견제하는 정도를 한다 해도 크게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미국처럼 한국도 대통령제라지만 미국의 의회에 비해 한국의 국회는 너무나 약하고 왜소하고 무기력하다. 힘도, 권한도 약하기에 의회정치도 정당정치도 협력보다 싸움과 갈등이 지배적이다. 나눌 권력이 크면 정치가 할 수 있는 조정 능력이 크지만 그렇지 않으니 작은 일에도 격렬하게 싸워야 한다.


상황이 이러니 대통령은 ‘강력함’의 상징이요, 대통령제는 ‘강력한 통치’의 제도적 원천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앞서 살펴보았듯이 이런 생각은 대통령제가 처음 만들어질 때 사람들이 가졌던 인식과는 거리가 있다. 처음 ‘President’라는 호칭을 결정한 사람들은 이를 “지극히 평범하고 평등한” 의미로 사용했다. 당시엔 “소방대장도 President이고 크리켓동호회 회장도 President”였다. 연방정부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주에서 임시직 행정 수반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들은 특별하지 않은 그런 비특권적 호칭을 사용하기로 결심했다.


이를 일본의 천황제 근대화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했던 후쿠자와 유키치 등의 지식인들이 일본어로 ‘다이또료(だいとうりょう)’ 즉 大統領으로 번역했다. 황제 이전의 나폴레옹을 가리켰던 ‘통령(統領)’보다도 과한, 지나친 번역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일본어 표현을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인 것은 아쉬운 일이다. 호칭에서부터 어마어마한 권위가 부여된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우리는 대통령들이 어느 자리에서나 일상적으로 ‘국민 여러분’이라는 표현을 앞세우는 것을 보게 된다. 이 점에서는 과거 군부정권 시기의 대통령이나 민주화 이후 대통령 사이의 언어 습관에서 달라진 게 없다. 대통령이라는 호칭과 대통령에 의해 호명되는 국민이라는 호명 사이에는, 통치자와 피통치자로 분리된 수직적 관계가 전제되어 있다. 대통령제를 만든 미국에서는 ‘동료 시민 여러분(Fellow citizens)’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대통령이 평등한 시민 가운데 자기 자신을 ‘시민 의장’ 혹은 ‘제1 시민’ 정도로 여기는 것이다.


순수 제도론으로만 보면, 대통령제는 약한 통치체제다.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주권(sovereignty)을 나눈 것에 있다. 현대 정부론을 만든 토머스 홉스나 장 자크 루소의 주권론이 가진 핵심은 “주권은 쪼갤 수 없다.”는 원리에 있었다. 그런데 대통령제는 바로 이 원리를 깨뜨리면서 등장했다. 주권을 쪼개면 통치권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흔히 유럽의 의회중심제를 가리켜 ‘권력융합’ 체제로 특징화한다. 입법부와 행정부의 권력이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게 아니라 융합해서 작동한다는 뜻이다. 반면 대통령제는 ‘권력분립’ 체제라 한다. 응집된 권력이 분립된 권력보다 강한 것은 자연스럽다.


의회중심제는 주권을 나누지 않고 단지 입법-행정-사법이라는 기능과 권한만 나눈 정부 모델이다. 대통령제는 기능과 권한을 넘어 아예 주권을 세 부서로 나눈 모델이다. 의회중심제에서는 시민주권의 요체인 입법부 내지, 입법부를 움직이는 다수당(다수연합)의 의지가 훨씬 더 강력하게 실현된다. 반면 대통령제에서 대통령의 의지는 입법부와 사법부 등 다른 권력 부서에 의해 제어된다. 복지국가를 만들고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수정한 것은 의회중심제에서 가능했다. 대통령제에서는 설령 그런 사회 변화를 대통령이 바란다 해도 입법부는 물론 재산권 보호와 개인 선택의 자유를 앞세운 사법부에 의해 저지될 때가 많다.


그런데 왜 우리 사회에서는 ‘대통령제 = 강한 통치체제’와 ‘내각제 = 정국의 분열과 불안정을 낳는 약한 통치체제’로 인식되는 것일까? 군부 권위주의를 겪었기 때문이다. 그런 등식은 권위주의 체제가 주도했던 ‘정치 교육의 산물’이다. 1960년 4월 혁명 당시 민주주의는 곧 내각제였다. 대통령제는 이승만 독재와 정치깡패의 지배로 여겨졌다. 이를 박정희 정권이 뒤바꿔놓았다. 내각제는 적 앞의 분열이요, 대통령제는 국가발전을 위한 안정된 통치체제라고 말이다.


권위주의 체제는 대통령제에 친화적이다. 강력한 통치권 행사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의 강력한 통치권 행사는 대통령제 때문이 아니라 체제가 독재이고 권위주의인 사실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민주주의로 정치체제가 전환되면 당연히 대통령제와 의회중심제 본래의 제도적 특성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대통령이 강력한 통치권 행사에 나서게 되면 체제의 민주성과 자주 충돌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권위주의는 권위주의에 맞는 정부론이 있듯, 민주주의에서라면 민주주의에 맞는 정부론이 있어야 한다. 아직 우리는 권위주의 시대의 정부론에 갇혀 있는지 모른다.


5.

현대 민주주의 정부 형태의 대표적인 유형에 내각제와 대통령제가 있음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내각제냐 대통령제냐 대신, 의회중심제냐 대통령중심제냐로 구분하는 것이 좀 더 정확하긴 하다. 대통령제에도 내각은 있다. 중요한 것은 그런 내각이 대통령에게 책임지느냐 아니면 의회에 책임지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의회의 신임 여부와 상관없이 대통령의 의사에 따라 내각이 운영되면 대통령중심제다. 반대로 의회의 신임 여부에 따라 내각의 운명이 결정된다면 의회 중심제다. 의회 불신임은 내각 총사퇴로 이어지고, 의회 역시 해산하고 총선을 다시 실시해 유권자 신임을 묻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런 정부 형태를 우리는 의회 중심제가 아닌 내각제나 내각책임제라 부르는데, 이런 용법이 오랫동안 관행이 되었다.


내각제나 내각책임제 대신 간혹 의원내각제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이건 좀 그렇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는 대통령제 국가다. 그런데 의원들은 내각에 참여한다. 참여해도 의원직을 상실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하면 의원이 내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를 대통령제가 아니라거나, 의원내각제라고 분류할 수도 없다. 겨우 타협할 수 있는 분류가 있다면 ‘내각제 요소가 포함된 대통령제’ 혹은 ‘대통령제와 내각제의 혼합형’으로 유형화하는 것이다. 혼합형의 장점을 살리려는 의도에서 더 적극적으로 혼합형 정부 형태라고 주장해도 좋다. 다만 내각 구성권을 대통령이 행사하느냐 아니면 의회 다수당(다수연합)이 행사하느냐와 같은, 더 근본적인 기준으로 보자면 한국은 엄연히 대통령제이고 대통령중심제이다.


물론 현행 헌법으로도 대통령은 국무총리를 국회로부터 추천받아 임명할 수 있다. 부처 장관 인선 역시 국무총리의 제청과 의회의 신임을 얻어 임명할 수 있다. 국회 다수당이나 다수연합이 국무총리를 추천하고 내각 인선을 주도한다면 사실상 의회중심제처럼 정부를 운영할 수도 있다. 헌법과 법률로는 의회 중심제 혹은 내각이 의회에 책임지는 정부 형태를 운영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대통령이 그렇게 하기로 결심해야 한다는 데 있다. 의회 중심제적 요소를 강화하든, 내각제처럼 정부를 운영하든 이 모든 것이 대통령에 달려있다는 것인데, 실제 그렇게 한 대통령은 없었다.


그나마 조금 가까운 형태가 있다면 흔히 ‘책임총리제’로 불리는 방식이다. 대통령이 국회의 동의를 얻어 총리를 임명한다. 그런 총리에게 일상적인 행정부 업무를 지휘하는 권한을 맡긴다. 대통령은 이른바 ‘대통령 아젠다’를 전담한다. 그야말로 정부 운영권을 대통령이 국무총리와 국회와 나눠서 혹은 서로 협력해서 행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실상은 말처럼 되지 않았다. 국회의장을 지냈던 정세균 총리조차도 책임총리였다고 말하기 어렵다.


법, 형식적인 기준으로 보면 한국의 정부 형태는 유연하다. 대통령이 결심하기에 따라서는 의회 중심제도 가능하고 의원내각제는 물론 내각의 의회 책임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법, 형식적으로는 열려 있는 이런 가능성이 현실에서는 실현되기 어렵다. 청와대라고 하는 비서실 권력이 이를 막는다. 대통령이 권력을 독점적으로 운영해야 자신들의 권력도 커지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열렬한 지지자 집단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국회를 해산하고 야당도 없애서 대통령이 맘대로 하길 바란다. 더 큰 문제는 대통령 권력, 그 자체가 절대적이라는 데 있다. 미국의 대통령제보다 훨씬 더 대통령 중심적이고 훨씬 더 행정부 중심적인 것이 한국의 대통령제다.


조지 워싱턴이나 제임스 매디슨처럼 처음 대통령제를 만든 ‘미국 헌법의 설계자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오늘날 대통령제를 보게 된다면,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것은 우리가 구상하고 실천했던 정부의 모습이 아니다.”라고 항변할까? 아니면 “지금의 대통령제는 공화정이 아니라 군주나 제왕을 위한 통치모델이다.”라며 화를 낼까? 370명 남짓의 정무직과 100명에서 150명 사이의 부처 파견 관료를 합해 500명 안팎의 비서진을 가졌던 트럼프 대통령 첫해의 백악관에 비해, 문재인 대통령 첫해 청와대가 490명의 비서진으로 출발한 것을 보았다면 자신들이 만들었던 대통령제가 왜 오늘날처럼 변형되었는지 돌아보게 되지 않을까?


대통령제와 민주주의 사이의 깊어지는 심연에 대해 진지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본다. 한국 정치의 모든 문제가 바로 대통령의 역할에서 발원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개별 대통령의 ‘인격적 문제’일까 아니면 대통령제라는 ‘제도의 문제’일까? 괜찮은 대통령이 뽑히길 여전히 기대해야 할까? 아니면 지금의 대통령제로는 기대난망이라 해야 할까? 이런 답 없는 고민이 다시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다.


박상훈

국회미래연구원 거버넌스그룹장

사단법인 정치발전소 학교장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대표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
고려대학교 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