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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생각

대한민국의 미래를 예측하고 대응전략을 마련하는 미래연구원 연구진의 기고문입니다
(본 기고문은 국회미래연구원의 공식적인 견해와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이상직] 우리는 누구인가: 근대적 라이프코스의 구조

작성일 : 2021-11-30 작성자 : 통합 관리자


우리는 누구인가: 근대적 라이프코스의 구조


첫 번째 글(“한국인은 어떻게 살아가는가?”)에서 나는 앞으로 9회에 걸쳐 한국인의 생애 문법과 그 의미에 대해 써 보겠다고 밝혔다. 이 글이 9회의 첫 번째다.


‘한국인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다양하게 답할 수 있지만, 나는 먼저 근대인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글에서는 내가 ‘근대적 라이프코스’라고 부르는 근대적 삶의 형식을 추상 수준에서 말해보려고 한다.


근대적 라이프코스라는 말을 어렵게 생각할 수 있지만 우리는 이미 그 그림을 대략 공유한다. 우리 삶은 표준화되어 있고, 제도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태어나면 대략 70-80세까지는 살 것이라 기대한다. 근대인은 이 전제를 내면화해 평소에는 죽음을 의식하지 않는다. 태어나면 먼저 학교에 간다. 한국에서는 만 6세에 초등학교에 입학한다. 이후 9년은 법률에 따라 학교에서 의무 교육을 받는다. ‘홈스쿨링’을 할 수 있지만, 이 또한 신고해야 한다. 보통은 고등학교에서 3년을 더 보낸다. 만 6세에서 만 18세까지, 12년을 학교에서 ‘학생’으로 보낸다. 고등학교 졸업자 상당수는 대학에 진학하고 나머지는 취업한다. 대학진학자도 몇 년 후에는 모두 취업하리라 예상한다. 대략 이 무렵까지를 ‘청년’으로 여긴다. 이후 대략 60세 무렵까지는 ‘노동자’로 지낼 가능성이 높다. 20대 중반 무렵 취업하면 떠올릴 법한 일이 결혼과 출산이다. 모두가 결혼하고 출산한다는 인식이 약해졌지만, 결혼과 출산은 여전히 자연스러운 일로 여겨진다. 이르면 20대 중후반에, 늦으면 30대 중후반에 결혼한다. 결혼과 출산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일로 여겨진다. 이런 시간표를 따른다면 대략 30대부터는 노동자이자, 배우자이자, 부모로 살아간다. ‘성년’의 삶이다. 성년의 삶은 제도적으로는 대략 60대 초중반에 노동시장에서 나오면서 끝난다. 이 과정을 밟은 전형적인 부모라면 은퇴 전에 자녀를 ‘독립’시켰을 것이다. 자녀가 취업하고 결혼했을 것이다. 남은 20여 년은 중년 때 모아놓은 돈이나 연금으로 살아갈 것이다. ‘노년’의 삶이다.


이러한 이미지에는 근대적 라이프코스의 특징이 드러나 있다. 일생은 또렷하게 구획된 여러 단계로 구성된다. 각 국면은 일정한 순서에 따라 배열된다. 삶이 단계적으로 나아간다는 이미지가 만들어지려면 인구 대부분이 짧은 기간에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이행해야 한다. 인구 다수가 비슷한 기간의 삶을, 삶의 각 단계를 비슷한 속도로 거치며, 살아가야 한다.


한국인이 이러한 그림을 그리게 된 지는 50년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틀은 세 차원의 사회 변동이 맞물리며 만들어졌다.


첫째, 인구학적 안정성이 확보되었다. 위생·영양 조건 개선과 의료기술의 발달로 사망률이 급감하면서 평균 수명이 늘어났다. 고령이 아닌 한 좀처럼 죽지 않게 되었다. 삶의 생물학적 예측 가능성이 높아졌다.


둘째, 생산체제가 바뀌면서 생애가 ‘생산 기간’을 중심으로 구획되었다. 산업화에 따라 생산 단위가 가족 단위 소생산자에서 기업 단위 대생산자로 전환되고 생산 방식이 가내수공업에서 공장제조업으로 전환되면서 노동의 결과물이 아니라 노동(시간)이 거래되었다. 잠재 노동력을 실제 노동으로 전환하는 문제, 즉 생산성을 높이는 일이 과제가 되면서 기계 작업에 최적화된 성인 남성을 중심으로 노동시장이 형성되었다. 동시에 노년이 제도적으로 분리되었다. 생산성 논리에 따라 공적연금제도에 기초한 정년퇴직제도가 도입되어 많은 이들이 생산능력과 관계없이 생년월일에 따라 노동시장을 떠났다. 성인 노동자는 기업 조직에 연공제가 도입되면서 안정적인 경력을 쌓을 수 있었다. 유년도 분리되었다. 전(前)산업 경제에서 부모나 어른의 감독과 지도 아래에서 수행되던 유년 노동이 쓸모없어지면서 이들을 잡아둘 기관이 필요해졌다. 학교다. 시간이 지나면서 학교는 예비 노동자와 군인을 훈육하는 적극적인 기능도 할 것이 기대되었다. 오늘날 학교는 청년을 노동시장에 배치하는 신호를 보낸다. 산업사회가 주창한 직업 선택의 자유가 초래하는 불확실성을 줄이는 것이다.


생산체제 재편이 시사하는 것은 가족과 노동, 가족과 복지, 가족과 교육의 분리다. 생애 시공간의 분리다. 가족이 경제적 기능을 상실하자 유대의 토대로 애착이 강조되었다. 가족 내 친밀성을 규율하는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성 윤리가 강조되었고, 남녀 역할이 규정되었다. 여성에게는 가정에서 가족성원의 정서적 돌봄을 책임지는 주부 역할이 권고되었다. 아동이 생산재에서 소비재로 탄생했다.


셋째, 근대 국가가 개인의 삶을 규율하기 시작했다. 가족에서부터 떨어져 나간 노동, 복지, 교육의 역할을 담당한 것이 근대 국가였다. 사람들은 국민이 되었고 인구가 되었다. 국가 규율에 따라 삶은 제도적으로 정의된 생애 국면으로 구획되었고, 한 국면에서 다른 국면으로의 이행은 제도적으로 정의된 사건(입학, 졸업, 취업, 퇴사, 결혼, 출산)의 경험 여부로 규정되었다.


근대적 라이프코스는 두 가지 원칙에 따라 제도화되었다. 먼저, 개인의 삶이 연대기적 나이에 따라 조직되었다. 근대 사회 제도 대부분은 연령에 따라 조직되어 있다. 다음으로, 각 생애 국면에서 지위를 배분하고 서로 다른 국면의 지위를 연결하는 틀이 정립되었다. 학력과 직종의 연계, 직종과 연금의 연계가 그 예다. 이 틀은 사람들을 개체가 아닌 영토를 경계로 한 인구라는 추상 개념으로 파악하는 관점을 만들어냈다. 출산율, 사망률, 경제활동 참가율, 실업률, 접종률 등 우리는 인구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일에 익숙하다. 통계라는 말의 영어 표현 statistics에서 stat는 state에서 왔다.


이러한 인구학적 패턴이 문화적 측면에서 삶의 ‘정상성’을 규정하는 배경이다. 생애 단계가 연령으로 또렷하게 구분되자 각 단계에 관한 표준화된 규범과 기대가 광범위한 사회적 승인을 얻었다. ‘아동기’, ‘유년기’, ‘청소년기’, ‘성인기’, ‘중년기’, ‘노년기’가 새로운 연구 대상이 되었다. 물리적 연령이 사회적 연령으로 전환되었다.


만 12세에서 15세로 구획되는 ‘중학생’ 범주에는 ‘본격적인 입시 준비로 접어드는 시기’라는 사회적 기대가 있다. 중학생은 그 기대에 따라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 이 말에는 무수한 행위 규율이 포함된다. 공부를 하든 하지 않든 중학생은 이 기대를 의식한다. 열심히 공부하는 (공부를 잘하는) 이는 긍정적인, 확고한 정체감을 갖는다. 대형 로펌 변호사로 일하려면 어느 대학에서 어느 전공을 택해야 할지 계산할 수 있고, 그 대학에 들어가려면 어떤 코스를 밟는 것이 합리적인지 알 수 있다. 반대로 어느 대학 어느 전공으로 졸업한 이는 자신이 어느 자리에 지원해 볼지 대략 안다. 노동시장 지위(직종/직위)와 교육제도 지위(학력/학벌)가 체계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사회 구성원들이 그 연계를 알기 때문이다. 절대적이지 않더라도 많은 이들이 그렇게 생각하면 그 고리는 일정한 객관성을 확보한다.


누군가는 위의 시간표대로 살아가지 않고, 시간표 자체도 나라나 시기마다 다르다. 그러나 큰 흐름에서는 ‘일반적’이라고 생각하는 삶의 궤적을 전제로 우리는 살아간다. 사회 제도와 조직도 그러한 시간표를 전제로 짜여 있다. 생애 각 국면에 대한 의미 체계도 그러한 시간표를 전제로 만들어져 있다. 이러한 틀이 있기에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계획하고 평가할 수 있다. 개인에게 삶이란 (사회적으로) 정해진 프로젝트로 인식되고, 삶의 의미는 그러한 프로젝트를 얼마나 제대로 수행했는가로 평가된다. 그것을 따르건 따르지 않건 각자는 그 의미 체계에 비추어 과거를 평가하고 미래를 계획한다.


근대 사회는 각 개인의 기대와 예상에, 그에 따른 준비와 노력에 일정 정도 부응했고, 그 결과 미래를 제시했다. 현재가 다소 만족스럽지 않아도 미래에는 좀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주었다. 자리는 달랐지만, 모두가 나름대로 사회적 사명을 부여받았다고 느꼈다. 모두에게 게임에 참여할 기회를 줌으로써 사회는 참여자들에게 ‘행복’을 주었다. 고도 경제성장을 배경으로 집합적인 희망과 집합적인 기회가 조응했던, 적어도 조응할 것이라고 믿었던 시절에 사람들은 꿈을 꿀 수 있었다.


이러한 틀이 흔들리고 있다는 인식이 커지고 있다. 서구로 치면 1970년대에, 한국으로 치면, 2000년대부터다. 근대적 라이프코스에 대한 관심도 그 틀이 흔들리면서 생겨났다. 근대적 시간표대로 많은 사람이 살아갔던, 서구로 치면 1950~60년대이고 한국으로 치면 1980-90년대에 사람들은 삶의 내용을 고민했을지언정 형식을 의식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기가 어려워지면서 ‘그렇게’의 의미를 자각하게 되었고 성찰하게 되었다. 몇몇 사람들은 이 점을 강조하면서 우리가 후기 근대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라이프코스의 틀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는 앞으로 구체적인 맥락에서 상세히 살펴볼 것이다.


이번 글에서는 근대적 라이프코스의 조건과 형식을 소개했다. 다음 글에서는 한 수준 아래로 내려와 젠더와 장애라는 관계론적 관점에서 근대적 라이프코스가 형성된 과정을, 근대적 라이프코스가 배제한 것을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이상직

국회미래연구원 부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