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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칼럼

대한민국의 미래를 예측하고 대응전략을 마련하는 외부 전문가의 기고문입니다
(본 기고문은 국회미래연구원의 공식적인 견해와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김영경] 누가 태화관길을 없앴나

작성일 : 2019-11-18 작성자 : 국회미래연구원



누가 태화관길을 없앴나






한국버츄프로젝트 대표

국회인성교육실천포럼 자문위원

前 모듬살이연대 상임대표


독일 Philipps-University Marburg 종교학 박사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퀴즈 하나. 5, 439, 1818, 10, 545 - 이들 숫자와 무궁화, 석정(石井), 한음(漢陰), 알파고, 태화관 - 이들 한글 중 어느 쪽이 더 기억하기 쉬울까?

물어보나 마나한 질문. 당연히 한글이 기억하기 쉽다. 해당 이미지가 기억 속에 함께 저장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숫자, 아니 보다 정확하게는 숫자가 들어간 도로명이 외우기 쉽고, 또 찾기도 쉽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믿겠는가? 믿기지 않으면 우리나라 도로명 정책을 담당하고 있는 행정안전부 관계자들에게 물어보라!


다음 질문은 또 어떤가? 한글로만 된 도로명과 숫자가 덧붙은 도로명이 있으면 어느 쪽이 더 좋을까? 이 역시 물으나 마나 한 질문. 예를 들어, 3·1운동의 주역인 33인의 민족대표가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역사적 건물, 태화관의 이름을 따서 지은 ‘태화관길’을 ‘인사동5길’과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는가? 조선 중기의 명신 이덕형의 호를 따서 만든 ‘한음길’과 ‘북한강로545번안길’은 또 어떤가!


그런데 사람들이 태화관길이 아니라 인사동5길을, 석정길은 마다하고 인사동10길을 쓰겠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혹은 행정당국이 한음길 대신 북한강로545번안길을 쓰라고 하면? “고맙다!” “잘했다!” 이렇게 해야 할까? 아니면, “어찌 그런 일이?”라고 하며 화를 내야 할까?


“이걸 질문이라고 하냐?” 이렇게 역정을 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누군가 이런 어리석은 질문, 삼척동자도 아는 질문을 하면 화를 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대한국민 국민이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했는데. 우리나라 도로명 7, 80% 정도가 이런 식으로 부여가 되었는데!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 이렇게 의아해하는 사람이 있으면, 지금 당장 서울 도심 인사동으로 달려가 도로명패를 살펴보기 바란다. 2007년 도로명주소 정책실시 초기, ‘태화관길’, ‘석정길’로 명명되었던 도로에 각각 ‘인사동5길’, ‘인사동10길’이라는 도로명판이 서있는 걸 확인하게 될 것이다.


이야기는 199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국가경쟁력강화기획단>에서 검토한 미래지향적 정책 가운데 도로명주소 정책이 있었고, 그해 말 내무부에 그를 위한 실무기획단이 구성되었다. 그리고 십 년이 지난 2006년, 마침내 정부가 ‘도로명주소 등 표기에 관한 법률’을 제정, 공포했다.


지난 100년간 사용해온 지번 주소 제도 대신 국제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새로운 도로명주소 시스템, 즉 도로에 이름을 붙이고 그를 기준 해서 건물 주소를 부여하는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참고로 필자의 서가엔 2012년 판 ‘도로명주소법령집’이 있다.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법은 참 잘 만들었다.


그에 따라 전국 방방곡곡 모든 도로에 현지 주민들이 반상회나 노인회 등을 통해 지은 이름이 붙고, 건물마다 그 이름을 담은 도로명판과 건물번호판이 부착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오 마이 갓! 문제가 발생했다. 새로운 제도에 대한 인식 부족과 계몽 부족으로 사람들이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한 것이다. 불만의 종류는 크게 2가지. 하나는 2011년 6월 2일자 문화일보 기사 제목, “‘새 도로명주소 바꿔 달라’ 민원 봇물”이 말해주듯 도로명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같은 해 7월 27일 프레스센터에서 개최된 ‘새 도로명주소, 전면 폐기 촉구토론회’ 제목이 말해주듯 아예 주소제도 자체를 원점으로 돌리자는 것이었다. 후자는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해 무위로 끝났다. 그러나 도로명을 바꿔달라는 민원은 그럴 수 없는 성격의 것이었다.


“역사적 인물, 꽃이나 식물 이름, 지형지물 등을 따서 지으면 된다고 하지만, 우리 동네는 새로 개발된 아파트 단지, 꽃도 나무도 몇 종류 없고, 역사적 인물은 더욱이 없는데 이 많은 도로를 어떻게 그런 이름으로 채울 수 있단 말인가?”


도로명과 관련된 민원 가운데 더욱 골치 아픈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김씨 문중 사람들 생각 다르고, 박씨 문중 사람들 생각 다르고, 산 아랫마을 사람들과 윗마을 사람들 생각 또한 각 각인데 어떻게 도로명을 정하란 말인가? 제각기 자기 마을에서 정한 이름을 고집하는데?”


이런 종류의 민원으로 몸살을 앓던 행정당국에 어느 날 반가운 제안이 하나 들어왔다. 서울 강남구에서 자체적으로 고안했다는 ‘기초번호방식 도로명부여 방법’! 즉 예를 들어, 인사동길, 북한강로처럼 주축이 되는 도로의 이름만 제대로 정하고 나머지 지선도로는 거기에 일련번호[기점 기준 왼쪽에 있는 지선도로에는 OO로1길, ~3길, ~5길 등 홀수번호를 부여하고, 오른쪽에 있는 지선도로에는 OO로2길, ~4길, ~6길 등 짝수번호를 부여] 또는 간격 번호[기점으로부터 예를 들어, 5450m 떨어져 있으면 OOO로545번길로 명명]를 부여하는 방식이었다.


이런 불평 저런 민원에 들볶이던 당국으로선 참으로 반가운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즉시 관련 공문이 하달되었고, 그 결과 애초 태화관길로 명명되었던 도로가 인사동5길로, 석정길이란 명판이 붙었던 도로는 인사동10길로 바뀌었다.


이를 어쩌면 좋나? 어떻게 하면 태화관길을 살릴 수 있을까? 답은 도로명주소법령, 구체적으로는 제7조(도로명의 부여·변경 기준)에 있다. 필자는 그를 통해 2014년 4월, ‘북한강로545번길’을 ‘송송골길’로, 그와 접해 있는 ‘북한강로545번안길’은 ‘한음길’로 되돌려놓았다.


이쯤 하면 다들 눈치챘을 것이다. 그렇다. 누구든 원하기만 하면 숫자가 붙은, 혹은 그것도 모자라 가, 나, 다가 덧붙은 형편없는 도로명주소 대신 무궁화길, 겨울연가길, 알파고길 혹은 존경하는 역사적 인물의 이름이 붙은 깔끔한 도로명주소를 가질 수 있다. 역사적 인물의 이름이 붙은 깔끔한 도로명주소를 가질 수 있다. 이와 관련, 보다 자세한 내용은 필자가 2012년 펴낸 책 <도로명과 대한민국 국격>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