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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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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고문은 국회미래연구원의 공식적인 견해와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은재호] 미래의 민주주의와 민주주의의 미래

작성일 : 2020-01-30 작성자 : 통합 관리자


미래의 민주주의와 민주주의의 미래








한국행정연구원 대외부원장/선임연구위원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겸직교수


프랑스 고등사범학교(ENS-Cachan) 정치학 박사






윈스턴 처칠(1874-1965) 영국 수상은 1947년 하원 연설에서 말하길 민주주의야말로 ‘지금까지 인류가 실험한 다른 모든 정치제도를 제외한다면 가장 나쁜 시스템’이라고 했다. 처칠은 ‘길거리의 보통 사람과 5분만 이야기 해봐도 민주주의가 얼마나 형편없는 것인지 금방 알 수 있다’고 하면서도 지금까지 인류가 만든 최선의 정치제도가 민주주의임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민주주의를 위한 변명으로 이보다 더 이율배반적인 수사(修辭)가 또 있을까?


많은 논객들이 민주주의를 일컬어 ‘대중의 손으로 뽑는 독재체제’에 불과하다는 독설을 날리지만, 미테랑(1916-1996) 프랑스 대통령과 인디라 간디(1917-1984) 인도 수상이 민주주의를 위한 변론에 기꺼이 가담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전자는 ‘아무리 바보 같은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제도적 권리를 보장해 주는 체제’가 민주주의이기 때문에, 후자는 민주주의가 ‘가장 약한 자들에게 가장 강한 자들과 동일한 기회를 보장해주는 체제’이기 때문에 독재와 전체주의에 대한 이상적인 대항마로 민주주의를 지지했다.


민주주의는 이렇게 산업혁명 이후 근 이백 여년이 넘는 기간 동안 보편적이고 이상적인 정치시스템으로 자리 잡으며 인류 발전과 시련의 모태가 되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는 미래 사회에도 적합한 의사결정시스템으로 작동할까? 미래의 민주주의를 살펴보며 민주주의의 미래를 그려봄으로써 더 건강한 민주주의를 꿈꾸는 것은 현재를 사는 우리들의 몫이다. 현재가 미래의 과거일 뿐이라면, 미래는 이미 과거와 현재 안에서 싹트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과거와 현재
소수 엘리트 시민이 주도하는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은 이미 오래 전부터 누적되어 과연 민주주의가 미래의 공적 의사결정시스템으로 제대로 기능할 수 있을지 무척 의문스러울 정도다. 거의 모든 선진국에서 공식적인 의사결정 기구인 정당과 국회, 정부와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는데, 그것은 투표 참여율의 지속적인 하락과도 무관하지 않다. 정치적 무관심의 이면에는 아이러니하게도 각성된 개인들의 직접 참여 욕구가 반비례하고 있다.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일반 시민들도 풍부한 정보를 가지게 됨에 따라 전문가와 시민 사이의 전문성에 별 차이가 없게 되어 대표와 위임의 경계가 함께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들은 과거와 같이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연결된 개인들’(networked individuals)로 집단화되며 사회적 존재감(social visibility)을 드러내는데 성공했다. 옛날처럼 ‘고독한 군중’(David Riesman)으로 남지 않고 자신의 고유한 목소리를 올곧이 대표하는 사회 집단의 창출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디씨(디시인사이드), 인벤, 일베(일간베스트), 펨코(에펨코리아), 루리(루리웹), 뽐뿌, 클리앙, 네판(네이트 판), 엠팍(엠엘비파크), 더쿠, 82쿡 등을 보라. 한국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펼쳐지는 정치참여는 오프라인에서의 참여와 달리 개인의 주장이 집단 속에서 표류하지 않는다. 사이버 공간은 공간적 제약을 받지 않고 무한정 팽창하는 속성을 지닌다. 그들은 자기 마음에 드는 집단을 만나거나 만들 때까지 얼마든지 분열하고 증식하며 직접 참여의 길을 열었다. ‘서초동’과 ‘광화문’으로 양분된 현대 한국 사회의 기저에 이처럼 비약적으로 발전한 정보통신기술이 숨어있다.


그게 다가 아니다. 정보통신기술을 넘어 나날이 발전하는 인공지능기술은 인간의 정보처리(information processing) 능력을 획기적으로 높여주어 민주주의 정치시스템의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시민참여의 대상과 범위가 과거와 같이 체제비판 같은 거대담론에 한정되지 않고 매일의 삶 속으로 파고들고 있다. 쓰레기 소각장, 화장장 같은 비선호시설은 물론 공항, 소방서, 특수학교와 같은 공공시설 나아가 국방군사시설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정책대상집단의 동의 없이 정부 혼자 추진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정당, 국회, 정부 등이 대표하는 고전적인(또 공식적인) 정책결정프로세스가 시민들의 직접 참여를 담아내지 못한다면 머지않아 정당성의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사이버 공간에서 집단화된 평범한 개인들이 자신의 일상을 둘러싼 공공정책 결정과정에 언제라도 참여할 수 있는 시민 중심 거버넌스가 가까운 미래에 정착될 개연성이 매우 높다.



미래의 민주주의
한국에서도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그 어느 때보다 커지고 있다. 직접민주주의의 기술적 조건도 충분히 성숙하고 있다. 이미 빗장 풀린 블록체인과 인공지능, 로보틱스, 사물 인터넷, 빅데이터 등 인공지능 기술이 의사결정과정에 접목되며 정책결정의 효율성과 합리성을 획기적으로 높여주고 있다. 알고리즘 민주주의(algocracy) 또는 디지털 민주주의(digicracy)의 출현이 그것이다.


●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시민참여 플랫폼, 바르셀로나 엔 코무(Barcelona en Comú)는 ‘데모크라시OS’(DemocracyOS)라는 오픈소스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고용창출과 직업훈련, 민영화 등 각종 정책에 관한 시민들의 의견을 정부에 전달하며 시민 주도 정책네트워크의 가능성을 증명했다.
● 타이완 정부는 인공지능의 기계학습 알고리즘과 클라우드에 기반하는 ‘폴리스’(POL.IS)라는 이름의 SaaS(Software as a Service, 서비스로서의 소프트웨어)를 활용해 우버 택시 도입여부를 결정하고 최근에는 이를 활용해 타이완-미국 비즈니스 공동협정에 대한 시민토의를 진행했다.
● 한국에서는 2017년 3월, 경기도 지역 프로젝트인 따복공동체 주민제안 공모사업 평가에 블록체인 기반 심사가 이루어졌다. 블록체인 기술을 통해 지방자치단체의 의사결정에 9000명이 넘는 주민들이 참여하는 직접민주주의를 실험하면서 향후 실질적인 분권과 자치가 가능해질 수 있다는 기대가 높아졌다.

알고리즘 민주주의 또는 디지털 민주주의의 발전은 지금처럼 거대 조직을 가진 오프라인 정당의 대표와 입법 기능을 디지털 네트워크 정당이나 시민 주도 정책 네트워크로 대체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열어놓았다.

● 스페인의 신생 정당 포데모스(Podemos)는 내친 김에 ‘루미오’(Loomio)라는 플랫폼을 활용해 40만 명의 당원이 대표 선출은 물론 주요 정책결정과정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2015년, 창당 1년 만에 제3당으로 부상하는 개가를 올렸다. 2019년에는 제4당으로 내려앉았지만 50만 명의 당원을 지닌 스페인 최대 규모의 정당이 되었다.
● 2013년 이탈리아 총선에서는 오성운동(Movimento 5 Stelle)이 창당 4년 만에 제2당으로 도약하며 디지털 정책네트워크가 대중정당으로 전환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2018년에는 32.7%의 득표율로 하원 선거에서 1위를 차지했다.
● 2012년에 창당된 아이슬란드 해적당(Pirate Party)은 인터넷 정보의 자유로운 공유, 저작권법과 특허권 철폐, 인터넷 상 개인 프라이버시 보장, 표현의 자유 등 카피레프트 정신을 바탕으로 직접민주주의를 주장하며 2016년 녹색당과 함께 원내 공동 제2당이 되어 좌파연합집권의 가능성을 열었다. 해적당 인터내셔널은 2006년에 설립된 스웨덴 해적당을 필두로 독일, 체코, 룩셈부르크 등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에 확산되고 있다.


민주주의의 미래
‘참여의 폭발’(Amitai Etzionoi)에 직면한 미래의 민주주의는 과학기술의 발전과 맞물려 정치행정시스템의 ‘위대한 신세계’(Aldous Huxley)를 열게 될 것이 분명하다. 특히 인공지능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은 시민참여의 형태와 방법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와 미래 민주주의 지형을 획기적으로 바꿀 것이다. 블록체인 기술의 발전에 따라 전자투표 제도가 활성화되면 사안에 따라 자신의 표를 원하는 사람에게 한시적으로 양도하고 거둬들이는, 대표의 위임과 회수가 자유로운 액체민주주의(liquid democracy)가 가까운 미래에 현실화 될 수 있다. 정보처리 능력과 합리적 판단능력이 인간보다 뛰어난 인공지능이 국회를 대체하지 못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그렇지만 정책결정 과정에서 인공지능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면 인간소외라는 고전적인 명제가 부활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미 진행 중인 디지털 격차가 새로운 사회적 불평등과 투쟁의 씨앗이 되어 알고크러시(algocracy)와 디지크러시(digicracy)의 미래를 낙관 할 수만도 없다. 게다가 알고리즘이 정치와 정보매개자로 기능하며 ‘필터버블’이나 ‘에코 체임버’ 현상을 조장한다면 집단 내 확증편향을 강화해 사회적 합의형성은 커녕 분열과 대립의 사회를 만들 수 있다. 더욱 의미심장한 것은 데이터의 우선순위 결정, 분류, 필터링 등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차별적이고 편향적인 데이터를 활용해 알고리즘의 의사결정을 왜곡하며 사실을 조작하고 진실을 호도할 수 있다는 우려다. 게다가 화웨이, ZTE, 하이크비전, 센스타임 같은 중국 기업들은 물론 마이크로소프트, IBM, 시스코, 써모피셔를 포함해 많은 미국 기업들이 제공하는 디지털 감시 기술은 이미 ‘오웰리언적(전체주의적)’(Mike Pence 미국 부통령) 통제와 감시국가의 도구로 충분히 활용되고 있다.

 
미래의 민주주의는 이 모든 부작용과 인공지능의 오·남용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미래 민주주의의 건강성을 위해 시민 개개인의 디지털 문해력(digital literacy)을 높이고 디지털플랫폼 사업자들에게 알고리즘 작동 방식에 대한 설명 책임을 지도록 하는 것 등은 가장 초보적인 대안에 불과하다. 미래의 민주주의가 포퓰리즘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팬옵티콘(panopticon)의 감시와 통제로 환원되지 않도록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미래의 민주주의 지형이 어떻게 변화할지 예측하며 민주주의의 미래를 준비하는 국회의 혜안이 절실하다. 미래를 만드는 것은, 예측이 아니라 행동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