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래기고   >   미래칼럼

미래칼럼

대한민국의 미래를 예측하고 대응전략을 마련하는 외부 전문가의 기고문입니다
(본 기고문은 국회미래연구원의 공식적인 견해와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양재진] 기본소득이 풍요로운 미래에는 사회보장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작성일 : 2020-05-14 작성자 : 통합 관리자



기본소득이 풍요로운 미래에는 사회보장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연세대학교 행정학과 교수


사회보장위원회 평가위원회 위원장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양극화해소와고용+ 위원회 공익위원

前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회 위원




이번 코로나19 전염병 사태로 인한 경제 위기 국면에서, 기본소득 논의가 다시 활발해지고 있다. 경기도민 전체에게 지급된 재난기본소득과 이에 뒤이은 중앙정부의 재난지원금이 현실화되면서 우리 곁에 성큼 다가온 느낌이다. 사실 기본소득의 요건을 갖추고 있지는 못하지만, 재난이라는 위기 발생 여부와 그 크기를 따지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지급했다는 점에서, 기존의 사회적 급부와는 질적으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경우, 고용보험의 고용유지지원금이 투입되면서 대량실업은 면하고 있다. 그러나 노동시장 정책 수단이 부족한 미국에서 지난 4월 실업률이 14.7%까지 뛰며 일자리 없는 사회의 불안함을 보여준 것도 한몫했다.


기본소득론자들은 AI와 로봇이 일자리를 없앨 것이라며 기본소득의 도입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얘기한다. 꼭 일자리가 다 사라진다고 말하지 못하더라도 일자리는 불안해질 것이며, 미래 사회의 엄청난 경제적 부와 풍요(abundance)는 기본소득의 도입을 현실화시킬 것이라고 얘기한다. 미래를 준비하는 차원에서 지금부터라도 조그만 규모로 도입하자는 주장도 종종 듣는다.


한번 가능한지 따져 보자. 과연 얼마만큼을 기본소득으로 지급해야 할까? 필리페 판 파레이스는 GDP의 25% 정도를 기본소득에 사용하자고 제안한다. 2018년 현재 한국의 GDP 대비 총조세 부담이 28%(사회보험료 제외 시, 21%)인 것을 감안할 때, 현실성이 없는 제안이긴 하다. 하지만 현실성을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해 현금성 복지급여 73조 원(GDP의 4.2%, 2017년)을 기본소득에 통합하는 것으로 하자. 이렇게 하면 모든 조세수입과 기존 현금성 복지예산을 합친 GDP 25%를 기본소득에 투입할 수 있다. 계산해 보면, 1인당 75만 원 정도 받는 셈이 된다. 


우연히도 우리나라 기초생활보장제도의 1인 가구 생계급여 약 50만 원과 주거급여 약 25만 원을 더한 정도의 값이 된다 (의료급여와 교육급여는 제외). 실업급여로 받을 수 있는 최대 198만 원과 비교하면 37.8% 수준이다. ‘모든 개인의 생계유지를 넘어 사회·문화 활동에 참여 할 수 있는 충분한 금액’인 완전기본소득이라고 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아주 최소한의 생계는 보장받는 수준으로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사회보장이다. 75만 원짜리 생계급여를 매달 받는다고, 사회보장의 수요는 크게 줄지 않는다. 국방 등 다른 공공서비스는 차지하고 현재 GDP의 7% 규모인 의료와 사회서비스도 제공 돼야 할 것이다. 앞서 현금성 복지는 기본소득에 통합했지만, 위험에 빠졌을 때 추가 소득보장의 수요를 외면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근로 연령대 사람이야 75만 원 기본소득 받고, 추가로 근로소득을 올릴 기회가 있을 테다 (크게 오를 세금 부담은 없다고 치자). 하지만 은퇴한 노인들에게는 추가적인 연금소득이 필요하다. 실업자도 추가 수당이 필요할 것이다. 육아휴직자도 마찬가지. 특히 중산층이 실업이나 은퇴라는 사회적 위험에 빠질 때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75만 원으로는 생활이 어렵기 때문이다. 급속한 고령화로 연 10%에 가까운 의료비 지출 증가를 감안할 때, 공적 의료가 이 증가 비용을 커버해줄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현 사회 지출 총액(GDP의 11%)의 두 배가 넘는 액수를 기본소득에 지출하면서, 의료와 사회서비스를 확충하기 어려울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개인이 갖게 되는 사회적 위험과 불안에 대한 대응은 민간보험 가입으로 이어질 것이다. 75만 원 기본소득이 모두 개인연금이나 의료보험 그리고 각종 보험 가입에 사용돼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미국 의료보험 시장에서 보듯 사회복지 부분은 시장실패 영역으로, 공적개입이 더 효과적이다. 그러나 결국 기본소득의 실시로, 공적 사회보장이 대체되거나 위축되는 상황에서, 개인의 복지 수준을 떨어지게 된다 (증가된 세금 부담은 논외로 치자).


만약 75만 원짜리 기본소득이 아니고, 모든 개인의 생계유지를 넘어 사회·문화 활동에 참여 할 수 있는 충분한 금액인 완전 기본소득으로 주어졌다면, 문제가 해결될까? 만약 GDP의 50%를 사용해 1인당 150만 원짜리 완전 기본소득을 도입하면 문제가 해결될까? 인간의 욕망을 만족시키고 불안을 잠재울까? 인간의 욕망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을 만큼 충분하게 풍요로워지면 문제가 해결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풍요로운 미래 사회에서도 인간의 욕망은 객관적이기보다 주관적이고 상대적일 것이다. 현재의 우리처럼 남과 항상 견주면서 끊임없이 커져만 갈 것이다. 절제나 금욕보다, 채워질 수 없는 욕망과 끊임없는 소비가 인간 본성에 가깝기 때문이다. 생태주의적 금욕의 필요성이 늘 논의되지만, 실현된 바는 없다. 1960년대에는 자동차에 에어컨이 없어도 흑백이라도 TV만 있으면 만족하고 살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그 이상을 원한다. 세계 제1의 생산국가인 미국의 경우, 1년에 단지 17주만 일해도 100여 년 전인 1915년 수준의 삶을 누릴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더 원하고 더 생산한다. 1991년 몰락할 당시 소련의 생산력은 서구 자본주의 국가에 비해서는 초라했을지 몰라도, 19세기 후반 마르크스와 당시 공산주의자들이 꿈꾸던 생산력을 훨씬 초과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 국민들이 요구하는 기본 욕구마저 충족 못 시키고 스스로 무너지고 말았다. 이번 코로나19 사태로 중국과 인도의 공장이 멈춰 수십 년 만에 깨끗한 공기와 아름다운 자연을 만끽할 수 있었지만, 이것이 우리의 삶의 방식을 생태주의적으로 바꾸어 놓지는 못할 것이다.


완전기본소득의 수준이 노동에 구속되지 않고도 인간다운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소박한 수준을 목표로 한다 할지라도, 생산력의 증가와 함께 욕망이 증가하면 ‘인간다운 삶’의 수준도 덩달아 올라갈 것이다. 따라서, 그 수준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비용 또한 계속해서 증가하게 된다. 끝내 완전 기본소득은 성취하기 어려운 꿈에 머문다. 


기본소득은 위험과 욕구 불문하고 모두에게 주어지기에 예산 소요가 천문학적이나, 1/n 해서 개인이 받는 기본소득은 늘 충분하지 못하다. 풍요로운 사회일수록 더 그러하다. 게다가 기본소득은 사회복지적 고려를 배제한 채 무조건적 보편성과 개별성을 핵심 요소로 하고 있다. 그러기에 개인이 언젠가는 겪게 되는 위험에 대한 보호에 취약하다. 기본소득에는 사회복지 급여의 원리를 구성하는 필요의 원리가 무시되어 있기에 발생하는 문제이다. 미래라고 사회적 위험과 생애주기 상 겪게 되는 위험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기본소득으로 사회보장의 중추를 삼을 수는 없다.


사회보장에는 ‘복지국가’의 원리가 작동해야 한다. 복지국가는 상부상조와 사회적 연대를 바탕으로 한다. 공동체의 돼지저금통에 시민들이 세금과 보험료를 십시일반 집어넣고, 필요한 사람이 필요한 크기에 맞추어 꺼내어 가는 시스템이다. 돼지저금통에 저금은 전 국민이 하지만 받는 n은 늘상 소수다. n이 작으니 급여가 후하다. 내가 당장 가져가지는 않지만, 나도 위험에 빠지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욕구가 발생하면 언제나 가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기본소득 국가에는 돼지저금통이 없다. 모든 이가 그대로 나눠 갖는다. 이보다 더 평등할 수는 없으나 n이 많으니 급여가 낮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사회적 연대나 상부상조도 없다. 그저 국가가 로빈훗 역할만 한다. 소득수준별로 재분배의 명암이 달라질 뿐, 사회적 보장도 복지도 없다. 현재도 미래에도 사회보장을 기본소득에 맡길 수는 없는 이유다.



<참고문헌>


OECD. Stat 데이터

양재진, 2018. “기본소득은 미래 사회보장의 대안인가?” 한국사회정책, pp.64-66.

양재진, 2020. 복지의 원리 한겨레출판, 2장ㆍ8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