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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호] 대한민국 시민사회, 그 위대함에 대하여

작성일 : 2020-10-27 작성자 : 통합 관리자

대한민국 시민사회, 그 위대함에 대하여

문정호 국회미래연구원 객원필진(현 국토연구원 부원장) 2020. 10. 27.


대한민국 시민사회, 그 위대함에 대하여



머리가 무겁고 마음이 불편한 주제 외에는 좀처럼 생각나지 않는다. 이런 것도 또 하나의 생활 속 괴로움, 무심결에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 흥얼거리다가 피식 웃게 된다. 2020년이 코로나 말고도 충분히 힘겹다고 느끼는 것은 비단 필자 혼자만은 아닌 듯하고, 우리 주위에는 어려운 일, 화난 사람, 부정적인 생각, 불합리한 현상, 못마땅한 것들이 너무도 많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보다 밝고 편하고 긍정적인 글짓기를 해야겠다는 오기가 생긴다.  


며칠 전 『시민의 상상력으로 대구의 미래를 짓다!』라는 제목의 책을 받았다. “대구광역시 신청사 건립 백서 I : 시민 공론화 과정을 통한 입지 선정”이라는 긴 부제가 달려 있다. 대구시의 신청사 건립은 2004년부터의 숙원사업이다. 당시 첫 번째 시도는 유보, 2008~9년 사이 두 번째 시도도 지역 간 유치경쟁, 어려운 재정여건, 정치적 쟁점화 등의 이유로 유보되었다. 2019년은 세 번째 시도, 시의회는 신청사 건립 추진을 위한 조례를 제정하였고, 민간 전문가를 중심으로 “공론화위원회”를 구성하여 주요 의사결정에 있어서 민‧관 협치체계를 가동한다. 여기서 무엇보다 특징적인 것은 가장 중요한 의사결정 중 하나인 신청사의 입지를 250명 시민참여단의 숙의평가를 통해 결정했다는 점이다. 


대구시 신청사의 경우도 4개 구‧군 간 첨예한 유치경쟁이 있었다. 중요한 것은 경쟁을 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공정한 경쟁의 장(場)과 규칙을 마련하는 일. 또한 경쟁의 결과에 대해 인정하고 승복하는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을 고안할 필요가 있었다. 대구시에서는 신청사의 기본구상에 일반시민 의견을 최대한 반영하고; 입지선정 항목과 기준을 공론화위원회 주도로 정하고; 각 구‧군에서 동수로 구성된 (지역‧인구‧연령별로 층화 후 무작위 선정) 250명 시민참여단이 2박 3일 간 일정으로 4개 후보지를 숙의‧평가하는 방식으로 해결했다. 이렇게 2019년 12월 결정된 신청사 입지에 대해 탈락한 구‧군이나 시민들 사이에서 이렇다 할 이견이나 항의가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이번 일은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대구의 시민정신이 일궈낸 쾌거라는 생각이다. 


앞에서의 대구시 사례 뿐 아니라 필자의 직업적 영역인 국토‧지역정책이나 도시계획 분야에서 국민과 시민의 역할은 지속적으로 확대‧증진되고 있다. 도시계획에 있어서 공람, 공청회 등 주민참여는 실효성 없이 형식적이기만 하다는 비판도 많지만 적어도 최근에는 “시민계획단” 같은 형식의 소통과 참여가 강화되고 있다. 각 지자체의 도시기본계획 수립에 있어서도 2014년 1건 있었던 시민계획단 운영 사례는 15년 6건, 16년 3건, 17년 5건, 18년 12건, 19년 6건 등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도시재생뉴딜 사업 같은 현안 문제에 대해서도 중간지원조직, 도시재생대학 등 다양한 형태의 소통과 참여가 이루어지고 있다. 2019년 말에 수립‧공포된 제5차 국토종합계획 수립과정에서는 170명의 국민참여단이 자발적 신청에 의해 구성되어 「국토계획헌장」 마련, 국토 비전과 발전전략 논의 등 큰 역할을 했다. 국토정책‧도시계획 분야에서의 이러한 현상을 사회전반적인 동향으로 확대해서 볼 때 필자가 느끼는 것은 우리나라 “시민사회”의 성장과 성숙이다. 


우리나라 현대사의 최근 흐름은 국가권력은 축소되고 시민사회1)의 영향력이 더욱 커지는 과정인 것으로 여겨진다. 1960~70년대는 정부권력이 경제, 사회, 문화를 주도하는 국가 패러다임이었다면, 1980~90년대에는 경제가 국가(정치), 사회를 주도하는 가운데 대항문화가 형성되고 시민사회와 지방 정치권력이 성장하는 시기였다. 2000년대에는 균형, 환경보전, 복지 같은 보다 다양한 사회적 가치들을 기초로 하는 사회적 집단의 영향력이 커지는 다원적 시민사회 패러다임이 형성되었다고 생각한다. 1987년 민주화 개헌 이후 1990년대 지방자치 실시, IMF의 충격과 경제체계의 변화, 2000년대의 여러 정치경제적 갈등, 그리고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숨 돌릴 새 없는 격변의 와중에서 일관성 있고 희망을 주는 큰 흐름 중 하나가 지속적으로 커지는 우리나라 시민사회의 역량이라고 믿는다.


우리 시민사회의 역량과 뛰어남을 가장 극면하게 드러내는 논거는 이른바 “K-방역”이다. 올해 2~3월 코로나19 확진자 급증사태에 대응하면서 정립된 K방역의 핵심은 한편으로는 검사-추적-격리로 이어지는 방역당국의 대응체계와, 다른 한편으로는 밀접‧밀집‧밀폐를 최소화하는 사회적 거리두기의 국민적 실천이다. 3월의 1차 위기가 지나고 8~9월의 2차 파동에 있어서도 이 핵심은 지켜졌고 아직은 안심할 단계는 아니지만 10월 들어 안정세가 나타나고 있다. 필자의 소견으로 이러한 K-방역은 성숙한 시민사회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외국의 시각에서 확진자 동선 추적 등 개인정보 공개에 대한 우려, 아시아 국가 특유의 “순종형” 국민성이라는 비아냥거림 같은 불쾌한 논평이 일부 있긴 했지만, 우리나라 정부 방역체계와 시민사회의 대응에 대한 찬사가 보다 일반적인 반응이다. 


최근 코로나19 확진자 수가 전세계적으로 4,000만명을 넘어서고, 한동안 진정된 것처럼 보이던 유럽 여러 나라에서 3~4월 1차 때보다 더 많은 확진자가 나오는 2차 위기 조짐이 확연하다. 북남미 국가들에서는 지난 5월 이후 확진자 수가 계속 증가일로에 있다. 어떤 나라는 아예 방역을 포기한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한다. 어떤 나라는 우리나라의 2.5단계 사회적 거리두기 보다 훨씬 강화된 형태의 봉쇄조치와 시행하기도 한다. 외신을 보면 코로나19 방역에 대한 사회적 갈등도 증폭되고 있다고 여겨진다. 방역실패에 대한 책임 추궁, 경제활동과 생존을 위협하는 봉쇄조치에 대한 불만, 국지적‧계층적 감염 확산과 위험성 차이에 대한 낙인찍기와 차별 등 이유는 너무나 많고 그들의 불행함이 선연하게 느껴진다. 물론 우리도 많이 힘들고, 불안하고, 불만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이 정도 선에서 방어하고 있는 것도 대단하게 생각되고, 그 기저에 현명하게 사태를 파악하고 침착하게 행동하면서 인내하고 희생하는 우리나라 시민사회가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고맙고 자랑스럽다. 


물론 “이게 나라냐!”하는 우리나라 시민사회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도 많이 있다. 매일 매일 삐져나오는 정치적 갈등, 혐오의 조장, 낙인과 차별, 가짜뉴스와 여론재판, 내로남불, 악성댓글 ... 각종 언론 매체는 언짢은 소식만을 전하는 것 같고, 국민 모두가 여하간의 이유로 불행하고 화내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불편함과 불만스러움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고 많은 경우 부당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나라 시민사회의 성장과 성숙, 그 위대함이 폄하할 필요는 없다. 비록 다툼과 미워함이 있더라도 시민사회는 우리의 희망이다. 아니면, 어느 정도의 갈등은 보다 큰 긍정의 밑거름이니 보다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관점에서 내다보았으면 싶다. 지속적인 사회 발전의 추동력은 이름 없는 보통사람들과 가장 상식적인 시대정신을 공감하는 시민사회로부터 나온다고 믿는다. 




 1) 시민사회는 정치철학이나 사회사상 계통에서 보면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논의인지라 필자는 그저 “위키백과”에서 찾을 수 있는 다음과 같은 단순한 개념으로 이해한다. "시민 사회는 공유된 이해, 목적, 가치를 둘러싼 강제되지 않은 집합 행동의 장(場)을 이른다. 이론적으로 시민 사회의 제도적 형태는 국가, 가족, 시장과 구별되지만, 실질적으로 국가, 시민사회, 가족, 시장의 경계는 복잡하고 모호하며 합의가 필요할 때가 많다. 보통 시민 사회는 다양한 공간, 행위자, 제도적 형태를 포괄하며, 형식성과 자율성, 권력 면에서 다양한 차이를 보인다. 시민 사회에는 등록 자선단체, 비정부 개발 기구, 공동체 조직, 여성 단체, 신앙 관련 단체, 직능 단체, 노동조합, 자조 집단, 사회 운동, 기업 집단, 연합 및 옹호 집단과 같은 조직을 아우른다. "“What is civil society?”. Centre for Civil Society, London School of Economics.

참고 링크 : https://ko.wikipedia.org/wiki/%EC%8B%9C%EB%AF%BC%EC%82%AC%ED%9A%8C



문정호

국회미래연구원 객원필진
국토연구원 부원장

미국 남가주대 (Univ. of So. Calif.) 계획학 박사
국토연구원 글로벌개발협력센터 소장 역임
대통령 소속 지역발전위원회 정책연구팀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