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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희] 여가부가 필요 없는 성평등 대한민국을 꿈꾸며

작성일 : 2022-04-06 작성자 : 통합 관리자

여가부가 필요 없는 성평등 대한민국을 꿈꾸며 글. 김상희 국회미래연구원 객원필진(현 국회부의장) 2022.04.06



여가부가 필요 없는 성평등 대한민국을 꿈꾸며
글. 김상희 국회미래연구원 객원필진(현 국회부의장)


“만세! 만세!” 2005년 3월 2일 오후 5시, 국회의사당에서 여성들의 환호성과 우렁찬 박수소리가 울려 퍼졌다. 호주제 폐지를 골자로 한 민법 개정안이 본 회의를 통과한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법률가 이태영 선생님이 1952년 남녀차별적 호주제 폐지를 처음 공론화한 이후 반세기만의 결실이었다. 부계 혈통 호주를 중심으로 가족이 구성된다고 규정한 가부장적 제도에 정면 도전했던 여성들이 강고한 구습에 가로막혀 좌절하고 또다시 부딪치기를 거듭한 끝에 이뤄낸 승리였다. 여성들이 법을 몰라 혼인신고를 안 하고 살다가 첩을 데려온 남편에게 자식까지 빼앗기고 빈손으로 쫓겨나는 경우가 허다했던 1950년대. 여성 권익 보호를 위해 ‘혼인신고를 합시다’ 캠페인을 벌여야 했던 시절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2005년까지 우리나라에는 동성동본 금혼 제도가 존재했다. 친족 관계 확인조차 어려운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단지 성(姓)과 본(本)이 같다는 이유로 결혼을 막은 것이다. 이로 인해 수많은 동성동본 사실혼 부부와 그 가정의 자녀들이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고 사회적 편견 속에 살아야 했고, 심지어 극단적 선택을 하는 안타까운 사건도 있었다. 사람의 혈통은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로부터 이어받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부계만 혈족으로 보고 혼인을 금지하다니, 얼마나 남녀차별적이고 비과학적인가.


지금이라면 취업 준비에 한창일 나이 25세를 정년퇴직 연령으로 보던 시절도 있었다. 1983년 직장인 이경숙씨가 낸 교통사고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재판부는 당시 법적 퇴직연령 55세가 아니라 25세를 정년으로 손해배상액을 책정했다. 여성은 평균 26세에 결혼해 퇴직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양성평등에 위배되는 부당한 판결이었다. 여성계는 이경숙씨와 연대해 2심에서 결과를 뒤집었고, 성차별적 ‘여성조기정년제’ 철폐를 위한 투쟁은 결국 남녀고용평등법 제정으로 이어졌다.

젠더폭력은 일상적으로 발생하지만 1990년대 이전까지는 공적으로 다뤄지지 못했다. 1994년에야 성폭력특별법 제정으로 성폭력 가해자를 처벌하고 피해자를 보호하는 장치가 마련되었다.



숨겨야 할 남사스러운 집안 문제 정도로 치부되던 가정폭력도 1997년 가정폭력처벌법 제정을 계기로 제도 내에서 다뤄지게 되었다. 디지털성폭력, 스토킹 등 유형도 다양해지고 날로 복잡해지는 젠더폭력에 대응하기 위해 법 제도 정비도 지속되고 있다.

여성의제가 국가적 정책의제로 공식화된 1983년 이후 40년간 여성정책·입법에는 상당한 진전이 있었다. 차별과 폭력에 맞서 여성들이 일궈낸 성과이자, 87년 민주화 이후 보수·진보 정권을 가리지 않고 정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성평등 정책을 추진해온 결과이다.



그간 전근대적 제도는 많이 해소되었지만, 더 복잡하고 어려운 과제들이 남아 있다. 우리나라는 유엔무역개발회의 설립 후 개도국에서 선진국이 된 최초이자 유일한 국가지만, 성평등 면에서는 선진국과 거리가 먼 초라한 성적표를 보여주고 있다. 대한민국은 여전히 강고한 성불평등 사회다.

세계경제포럼 2021년 성별격차지수 156개국 중 102위, 성별임금격차는 35.9%로 OECD 1위, OECD 중 유리천장 지수 9년 연속 꼴지를 기록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더믹을 겪으며 여성의 돌봄시간은 더 늘었고, 경제활동 참가율은 IMF 외환위기보다 하락했다. 육아기 경력단절을 나타내는 여성취업률 M자 곡선도 여전하다. 여성 노동자 중 비정규직 비율이 45%에 달하지만, 상장법인 여성임원 비율은 5.2%에 불과하다.



공적 영역에서 여성 대표성 역시 취약한 실정이다. 21대 국회 여성의원 비율은 19%로 역대 최고지만, 2021년 세계 평균 25.6%에는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다. 여성 광역단체장이 지금까지 한 번도 배출되지 못했고, 기초자치단체장 중 여성은 겨우 8명(3.5%), 광역의원 여성 비율도 비례대표를 포함해 19.4%에 불과하다. 오는 6.1 지방선거에서 여성 대표성을 강화하기 위한 공천 개혁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젊은 여성들을 만나보면 “저출산과 인구절벽이 문제라고 하면서 왜 젠더 문제는 외면하느냐?”는 반문을 자주 듣는다. 여성들은 여전히 우리 사회가 안전하게 한 인간으로서 존중받으며 자기실현을 하기 어려운 사회라고 인식하고 있다. 여성이 공적 영역에서 배제되고, 채용·배치·승진·임금에서 차별을 받고, 결혼과 출산이 곧 경력단절로 이어지고, 일상적으로 불법 촬영과 여성혐오 살인의 공포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사회 환경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 


문재인 정부 초대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 시절, 여성의 희생을 강요하는 저출산 정책은 성공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국가가 목표치를 제시하고 출산을 장려하는 방식을 벗어나, 성평등 사회 실현과 실질적 삶의 질을 높이는 방향으로 저출산 정책의 패러다임 전환을 시도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이번 20대 대선 과정에서 20대가 보여준 표심의 향배도 이와 다르지 않다. ‘이대녀는 혐오와 차별을 조장하는 구태를 심판했고, 이대남은 그들의 목소리에 귀 닫은 오만을 심판했다’는 논평은 정곡을 찔렀다고 생각한다. 정치권이 성평등 가치를 내팽개치고 심각한 빈부격차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데 대한 준엄한 심판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젠더 문제로 편 가르기를 하며 갈등을 조장할 것이 아니라, 연대와 협력으로 여성과 남성 모두 살만한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지속가능한 대한민국의 기본조건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국가 아젠다에서 ‘성평등’이 사라질 위기다. 새 정부 인수위는 이례적으로 여성 분과를 두지 않고, 인선에서도 여성 할당을 하지 않았다. 여성가족부 폐지도 공약대로 추진하겠다고 한다. 여가부 업무를 각 부처로 이관하는 대신 여성가족위원회를 만드는 방안을 검토한다는 얘기도 들린다. ‘우리 사회에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는 그릇된 인식에서 나온 틀린 해법이다. 앞으로 전개될 상황이 더욱 우려스럽다.

여가부의 역사적 소명은 아직 남아있고, 구조적 성차별은 여전히 강고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여가부 기능의 강화다. 성차별 시정 정책을 더욱 강화하여 체계적으로 추진할 조직과 예산을 보강하는 여가부 재편이 필요하다. 부처 명칭은 ‘성평등가족부’도 좋다. ‘여가부 없는 대한민국’이 아니라 더 이상 ‘여가부가 필요 없는 성평등 대한민국’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공통목표가 되어야 한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역사의 진정한 가치는 우리를 과거로부터 해방시키는 데 있다”라고 했다. 우리가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는 과거를 통해 교훈을 얻어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다. 차기 정부가 우리나라 성평등 추진체계와 정책의 변천 과정을 돌아보고 교훈을 얻길 바란다.




김상희

제21대 국회 전반기 부의장
제18대, 19대, 20대, 21대 국회의원(부천병)
문재인정부 초대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
참여정부 대통령자문 지속가능발전위원회 위원장
여성민우회 상임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