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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보도

[한겨레] 미래 상상하는 흥미의 실종

작성일 : 2024-01-29 작성자 : 국회미래연구원

	


[뉴노멀-미래] 미래 상상하는 흥미의 실종


글. 박성원 국회미래연구원 연구위원



아이들이 덜 태어날수록 사회는 미래를 상상하는 흥미와 능력을 잃어버린다.


내가 언제 처음으로 미래를 적극적으로 생각해봤을까 떠올려 보면, 첫아이가 태어났을 때였던 것 같다. 이 아이가 내 나이가 되어 맞이할 미래, 더 나아가 이 아이가 100살이 되면 맞이할 22세기는 어떤 모습일지 무척 알고 싶었다. 통상 부모가 자식보다 먼저 세상을 뜬다고 보면 아이가 노인이 될 무렵, 나는 그 세상에 없을 것이다. 그래도 나의 분신이 존재할 테니 그 미래가 몹시 궁금했던 것이다.


그 뒤 지난 20년을 되돌아보면 가장 놀랄 만하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변화로, 순전히 나의 개인적인 관점에서는 유아차에 반려견을 태우고 다니는 모습을 꼽겠다. 유아차의 아이나 반려견은 내 삶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며 보호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비슷하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났을 때 했던 미래 상상을 반려견이 태어날 때도 할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아이는 장차 세상을 바꿀 힘을 키우겠지만, 반려견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반려견 대부분은 주인보다 일찍 죽는다.


기독교의 성경에서 마태복음은 예수가 태어날 무렵 2살 미만 아이들이 당시 유대의 헤롯왕에게 집단으로 학살당한 사건을 기록했다. 헤롯왕이 장차 자신의 정적이 될 ‘왕’이 태어났다는 소문을 듣고 이를 사전에 없애버리기 위해 벌인 짓이었다. 국가의 최고권력자가 고작 한 아이의 탄생을 두려워했다는 이야기에는 신화적 요소가 다분하지만, 아이의 ‘탄생’이 어떤 민족에겐 구원의 메시아의 등장이란 점은 이해할 수 있다. 그 아이의 탄생을 통해 사람들은 현재 삶의 어려움을 견뎌내는 힘을 얻을 수 있고, 그 아이가 혁신적으로 바꿀 미래사회의 모습도 전망할 수 있어서다.


유아차에 아이보다 반려견을 더 많이 태우고 다니는 지금의 시대는 분명 ‘현재중심적’인 특징을 보인다. 계획한 대로 되지도 않을 미래에 인생의 중요한 자원과 시간을 투자하느니 오늘의 소소한 행복을 추구하는 태도다.


더구나 미래만 생각하면 우울하고 무력감만 느껴진다. 지나가는 사람 누구라도 붙잡고 ‘미래사회’를 가늠해보는 단어를 얘기해보라고 하면 뭐라고 할까.


기후위기의 심화, 인공지능의 발전으로 인한 인간의 일자리 대체 가속화, 사회적·경제적 양극화 심화, 개인의 사회적 고립의 심화와 우울증 환자의 증가, 초고령화와 초저출산, 남북의 잦은 갈등과 위협, 중국과 미국의 적대적 경쟁, 정부와 국회의 사회갈등 조정 약화, 주거 불안정, 무한경쟁을 부추기는 교육제도, 경제성장률의 지속적인 하락…. 만약 이런 단어들을 떠올렸다면, 당신은 비관론자에 가깝다. 미래가 현재보다 못할 것으로 전망하는 것이다.


미래가 부정적이어서 우울하고 무력해지는 것일까. 사람들이 우울감과 무력감을 느끼는 이유는 미래가 부정적이어서가 아니라 미래가 결정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미래를 바꿀 수 없다고 믿기에 우울하고 무력해지는 것이다. 비관적이어도 바꿀 수 있다면 우울하지 않다. 우리 사회에 우울증 환자가 증가하는 현실에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결정론적 미래관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정해진 미래’라는 개념은 환상이고 비역사적이며 비과학적이다. 세상은 변한다, 늘.


그렇지 않아도 무기력한 시대에 설상가상 미래를 바꿀 아이들이 점점 덜 태어나고 있다. 태어난 아이들도 성장하면서 세상을 바꿀 힘은커녕 버틸 힘도 잃어간다. 우울증과 불안장애를 경험한 환자 중 20대와 10대 증가율이 가장 높다는 점은 매우 걱정스럽다. 아이들이 지속해서 감소하는 사회에서는 미래를 새롭게 상상할 기회가 줄어들고, 새로운 희망도 품지 못하고 있다. 아이들의 탄생과 성장을 지켜보는 것만큼 가슴 뛰는 일도 없는데 말이다.


- 출처: 한겨레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12623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