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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생각

대한민국의 미래를 예측하고 대응전략을 마련하는 미래연구원 연구진의 기고문입니다
(본 기고문은 국회미래연구원의 공식적인 견해와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박성원] 음악, 노인, 유머

작성일 : 2021-12-29 작성자 : 통합 관리자


음악, 노인, 유머


나는 퇴근하면 차 안에서 라디오를 켜고 주파수를 ‘배캠’에 맞춘다. 배철수의 음악캠프. 1990년부터 시작된 배캠은 올해 31년째다. 아마 최장수 라디오 프로그램일 것 같다. 오후 6시면 흘러나오는 디스크자키 배철수의 오프닝 멘트, “배철수의 음악캠프, 출발합니다~”가 나올 때, 나도 마치 그처럼 따라한다.


그가 틀어주는 팝송의 내용이나 뮤지션을 몰라도, 듣고 있으면 하루의 피로가 풀린다. 시청자의 사연을 읽어주며 공감을 표하거나 재치있게 의미를 부여해주는 배철수의 멘트에서 나는 힐링의 기운을 느낀다. 배캠은 어떻게 30년 넘게 사랑을 받게 되었을까.

배캠 월드의 세계관을 세 단어로 요약한다면 ‘음악’ ‘노인’ 그리고 ‘유머’를 꼽겠다. 음악은 배캠에서 다루는 콘텐츠이고, 노인은 음악을 다루는 사람의 아이덴티티이며, 유머는 노인이 음악을 다루는 방법이다.


배철수는 나이로 치면 노인이지만(1953년생으로 새해가 되면 한국 나이로 70세다), 내가 말하는 노인은 나이가 많다는 뜻이 아니다. 그는 나이와 상관없이 어떤 뮤지션과도 어울리며, 어떤 게스트가 나와도 그의 무대를 돋보이게 만든다. 시청자 사연에 대한 그의 코멘트를 듣고 있으면 재치와 순발력이 느껴진다.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으며,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로 감동을 이끌어낸다. 실수라도 하면 잘못했다고 곧장 사과한다. 배캠 월드를 이끌고 있는 노인은 현자(賢者)다.


이 현자가 들려주는 음악은 오로지 팝송이다. 나는 라디오를 즐겨듣는 애청자는 아니지만, 팝송만으로 2시간을 구성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은 들은 바 없다. 배철수는 유능한 작가들을 통해 그날 들으면 ‘딱’ 좋을 팝송을 선곡하고 틀어준다. 가수는 누구이고, 누구의 친구이자 연인이었고, 밴드에서 드럼은 누구였고, 지금은 죽었지만 전설처럼 남아있다는 등 매우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해준다. 듣는 나는 마치 팝송계의 대가가 된 느낌이 든다.


음악을 틀어주는 그 노인은 유머 감각이 대단하다. 다양한 팝송과 그 팝송을 즐기는 시청자를 연결하는 그만의 코드가 있다. 예컨대, 지난 금요일, 한 시청자는 문자 메시지로 이런 내용을 보냈다. “아저씨, 이 노래는 금요일에 들으면 딱 좋을 노래네요!” 이 사연을 읽어주면서 배철수는 이렇게 받아친다. “왜요?” 왜 금요일에만 어울린다고 생각하냐는 물음인데, 왠지 미소가 지어진다. 오랜 친구가 상대의 마음을 알아주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관계와 대화를 이어가려는 그 스킬이, 그 배려가, 그 유머 감각이 나는 배우고 싶다.


음악, 노인, 유머. 배캠 월드를 구성하는 3개의 핵심 요소를 나의 삶에 대입해 보았다. 나는 어떤 콘텐츠를 다루고 있나. 미래사회 혹은 미래사회상(象, image)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양한 미래의 모습, 이 미래를 추동하는 요인들, 이런 요인들의 상호작용, 이 때문에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미래를 나는 다루고 있다.


이런 콘텐츠를 다루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는 비저너리(visionary, 상상가)를 생각해보았다. 문어적 의미 그대로 미래 상상가. 좀 더 의미를 부여한다면 내가 상상하는 미래가 아니라, 동료 전문가들과 미래워크숍 현장에서 만나는 시민들이 상상하는 미래, 좀 더 나아가 사회구성원이 바라는 미래를 확인하고 공론화하는 상상가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미래사회라는 콘텐츠를 다루는 상상가는 어떤 방식으로 미래에 대한 여러 정보를 흥미롭게, 의미 있게 엮어내야 하는 것일까. 여러 방법과 스킬이 있겠지만, 이전에는 연결되지 않은 요인들, 사건들, 현상들이 실은 어떤 흐름으로 연결된다는 시각을 제시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통찰이라고 해도 좋고, 새로운 연결성의 발견이라고 해도 좋겠다.


미래사회(콘텐츠), 상상가(나를 설명하는 말), 새로운 연결성(콘텐츠를 다루는 방식)으로 정리하고 보니 앞으로 내가 추구해야 할 미래연구자의 한 전형으로 느껴진다.


2022년 새해, 여러분이 창조하고 싶은 세계를 구성하는 3개의 키워드는 무엇일지 궁금하다. 꼭 3개의 키워드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잘 해왔듯 앞으로도 별 변화 없이 유지만 잘해도 훌륭하다. 그럼에도 3개의 키워드를 생각해보고 이것을 엮어 자신의 새로운 계획을 설명해본다면 어떨까. 자신의 계획이 지향하는 가치와 목표가 더욱 분명하게 다가올 것 같다.


우리의 세계는 한국에서만 5천만 개의 월드가, 전 세계에 80억 개의 월드가 반짝반짝 빛나는 멀티버스(multiverse)이다.


박성원

국회미래연구원 혁신성장그룹장

前 과학기술정책연구원 미래연구센터 연구위원
University of Hawaii at Manoa
Political Science (Futures Studies) Ph.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