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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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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고문은 국회미래연구원의 공식적인 견해와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정혜윤] 우리가 모르는 일본(1) 일본 현대 민주주의의 출발점: 미군정의 점령 개혁

작성일 : 2024-03-25 작성자 : 통합 관리자



한국에서 일본 논의는 과거사에 집중된다. 한일관계 특성상 불가피한 부분도 있겠으나 특정 부분은 다소 과장해 해석하는 반면, 이외 부분에는 무관심하다. 그런데 비록 불편한 이웃국가라 해도 생각해 볼 부분도 있다.

가장 큰 편향은 전전(戰前)과 전후(戰後)를 구분하지 않고 현대 일본을 군국주의의 연장선으로만 이해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일본은 1945년 패전 이후 민주주의 국가로 분류된다. 사실 ‘자민당 일당독재’란 수사는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민주적 선거경쟁이 존재하지만 일당이 장기적으로 우위를 차지하는 체제는 한국의 87년 이전 권위주의체제와 구분된다. 1932년부터 44년간 사회민주당이 집권한 스웨덴을 독재국가라 말하지 않듯 말이다.

물론 전전과 전후의 연속과 단절은 일본에서도 중요한 학술적 쟁점이다. 그러나 그 어떤 논의도 전후 민주주의 역사를 무시하고, 전전 군국주의가 그대로 이어진다는 주장과 거리가 있다. 또한 일본 민주주의 분기점이 1945년부터 1952년까지 존재한 미군정의 점령 통치 기간이라는 데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미국의 점령 통치는 1945년 8월 30일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가 미군과 함께 일본 땅에 첫발을 내딛으며 시작되어 7년간 이어졌다. 한국도 1945년부터 48년까지 미군의 점령 통치가 이루어 졌으나 양국의 통치 방식 및 목표는 차이가 컸고, 현대사에서 의미도 다르다.

남한에 주둔한 미군은 소련과 협의를 통해 신탁통치(직접 통치)를 했고, 남한 정치·사회 안정을 우선시했다. 냉전 질서가 고착될수록 미국은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에 관심을 둔 반면 개혁 정책에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했다. 남한을 통치한 점령 세력은 순수한 군사 조직에 가까워 식민지를 경험한 한반도의 특수성이나 남한 내 정치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미군정은 일제 관료와 경찰 기구를 적극 활용했다. 이들이 제공한 정보를 토대로 남한 내 자발적 조직에서 주류였던 좌파 조직을 탄압했다. 즉 남한에서는 구(舊)식민지 국가기구가 ‘민주개혁’의 과정 없이 복원된다.

분기점으로서 미군정의 점령 통치 : 비군사화와 민주주의를 위한 개혁의 시대

이에 비해 일본에서 점령 정책을 주도한 정책 입안자들은 일본이 다시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 국가가 되도록 비군사화와 민주주의 개혁에 역점을 두었다. 상대적으로 미국에는 지일(知日) 전문가들이 존재했으며, 점령 초 일본으로 파견된 행정관, 법률가, 학자 중심의 뉴딜주의자가 민정국(Government Section:GS)이 중심이 되어 미군정의 정책 입안과 실행을 주도했지만 간접통치 방식이었다.

미군정은 국내와 해외 주둔 군대를 모두 해산시켰다. 육군성·해군성·군수성 등 군사 관료 기구는 물론 군국주의와 관계된 대정익찬회(大政翼賛会) 등 단체도 모두 강제 해체했고 군수산업이 금지되며 관련 공장 가동도 전면 중단된다. 극동 전범 재판이 열려, 전쟁 발발과 수행에서 핵심 역할을 담당한 이들 중 7명이 교수형을 당했고 4,370명이 유죄를 받았다. 군인뿐 아니라 정치인·관료·사업가·언론인 중 전쟁 책임자에 대한 광범위한 공직 추방이 이루어져, 총 22만 명이 공직에서 쫓겨났다. 공직 추방은 무혈혁명이라고 불릴 정도로 일본 정·재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군정은 일본의 상당수 군국주의 국가기구를 폐지했고 행정적 관료 기구 일부만 통치에 이용했다.

물론 일본이나 한국에서 미군정이 민주주의적 기본 질서를 이식하려 한 점은 근본적으로 같다. 양국 모두 미군정에 의해 여성참정권을 비롯해 보통선거권이 전면 도입된다. 그러나 한반도에 주둔한 미군정은 민주적 제도와 질서를 수용하도록 했지만, 정치적 자유를 모두 허용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한반도와 일본을 점령한 미군정의 가장 큰 차이는 좌익 정책이다.

일본 점령군은 공산당 간부를 포함한 2천4백여 명의 정치범을 모두 석방시킨다. 언론과 사상을 통제한 <치안유지법>을 비롯한 악법도 모두 철폐했다. 특히 점령 초 미군정을 지배한 정책 입안자들은 일본이 다시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 국가가 되려면 ‘민주주의의 학교’라고 할 수 있는 노동조합과 그에 기반을 둔 좌파 정당이 사회의 기본 조직으로 필요하다고 보았다. 가령 맥아더 사령관은 반공주의자였지만 일본에서 노동운동이 활성화되어야 반(反)군국주의에 입각한 민주주의 전통이 정착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일본노동조합법>은 헌법(1946년 11월)보다 앞선, 1945년 12월에 통과된다. 미군정이 노동조합의 결성을 장려하자 노동운동도 활발해졌다. 3만 5천 개의 노동조합에 650만 명의 노동자들이 가입했다. 좌파 정당도 크게 부흥하며 신헌법 하에 치러진 첫 선거에서 사회당이 제1당이 되면서 사회당·민주당 내각이 수립될 수 있었다.

반면 한국을 통치한 미군정은 정치 공백 상태에서 대안 정부를 자임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나 ‘조선인민공화국’ 등 온건 좌파 세력이 포함된 자발적 민족 운동 조직까지 모두 공산주의자 조직으로 보아 부정적으로 인식했다. 한국의 미군정이 좌파를 견제할 수 있는 반공적이고 폭력적인 우파 세력을 적극 지원했으며 노조를 탄압하고, 우파 정당과 어용 노조를 적극 육성한 이유가 되었다.
일본 현대사에서 미 점령기가 가장 중요한 분기점인 이유는 정치·경제 질서가 전면 재편되었기 때문이다.

메이지헌법이 개정되며 첫째, 천황은 국가와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제한되고, 국가 지도자는 국민의 손에 의해 선출되도록 민주정치의 틀이 도입되었다. 둘째, 전쟁을 영원히 포기하고 군비와 교전권을 부정하는 9조를 보유하며, 일본 헌법은 ‘평화헌법’이라고 불리게 된다. 자위대나 일본의 해외파병이 매번 ‘위헌’ 논란의 대상이 되는 이유다. 사실 천황의 전쟁범죄에 대한 처벌과 천황제 존속 여부는 연합국 간 국제적 쟁점이었다. 그러나 지일(知日) 미국 관계자들은 천황을 전범 재판에서 제외시키고 천황제를 존속시키는 편이 일본에서 민주주의 개혁을 추진하는 데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다. 결국 쇼와(昭和) 천황은 처벌 대신, 상징적 존재로 역할을 바꾸며 생존할 수 있었다.

미군정은 미쓰이(三井), 미쓰비시(三菱), 스미토모(住友), 야스다(安田) 등 재벌 위주의 경제체제가 팽창주의와 군국주의에 기여했다고 보아 재벌 해체가 비군사화의 핵심이라고 여겼다. 4대 재벌은 자회사와 본사까지 모두 해체되며 재벌 가족 소유의 자산은 동결되고 수많은 작은 회사로 분할되었다. 이를 계기로 일본 전후 경제는 소니(ソニー), 스바르(スバル), 혼다(ホンダ), 마쓰시타(松下) 같은 새로운 기업이 성장하게 되었다.

토지개혁도 실시되며 지주-소작농 관계가 사실상 해체되었으며, 모든 군국주의 교육이 폐지되고 민주적 교육제도가 도입되었다. 지방자치도 시작돼 지방의회 의원과 자치단체 수장을 주민의 투표로 선출하는 등 현대 일본 민주주의 체제의 근간을 이루는 제반 개혁 조치가 시행됐다.

반개혁(역코스) 시기와 구체제 회귀의 실패

물론 개혁정책은 계속되진 못했다. 세계적으로 냉전 질서가 심화되고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일본 미군정의 정책 역시 1940년대 후반이 되면 ‘역코스’(逆コース)라 불리는 반(反)개혁 바람에 휩싸인다. 미국은 일본을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견고한 방벽이자, 경제적으로 강력한 자립적 국가로 만드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했다. 특히 연합군 사령부 내 뉴딜주의자 중심의 민정국이 헤게모니를 잃고, 정보·보안·검열을 주요 임무로 하는 군인 중심의 정보제2본부(General Staff Section, G2)가 주도권을 얻었다.

미군정은 1947년 2월 1일 총파업 중지를 명령하고 1949년 7월에는 공무원의 쟁의를 금지시켰다. 재벌 해체 작업은 중지되고 기업의 자유경쟁을 독려했다. 1949년부터 공무원, 기업체, 교육계 및 언론계에서 공산당 계열 인물이 추방되면서 정부 기관에서는 9천 명, 민간에서는 2만 명이 축출되었다. 지난 아베 수상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를 비롯해 A급 전범으로 분류되던 이들이 석방되고 군국주의 세력으로 분류되었던 20만 명의 보수계 인사들이 공직 추방에서 해제돼 정계로 복귀했다. 복권된 전전 세력은 끊임없이 구체제 회귀를 시도했다. 가령 1955년부터 1956년까지 수상이었던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郞)나 다음 수상인 기시(岸)수상은 각종 구질서로 돌아가는 조치를 취하며 사회당·공산당 및 노동조합들과 대립했다. 나아가 일본이 다시 군대를 보유한 보통 국가가 되도록 평화헌법 무력화를 위해 미국과 일본 사이 안보 조약을 재개정하고자 협상에 들어갔다. 새로운 안보 조약에는 일본이 아시아에서 군사적으로 좀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조항이 포함됐다. 궁극적으로는 헌법 9조를 개정해, 일본은 군사력을 보유할 수 있는 나라로 만들겠다는 의도였다. 그러나 구체제로 회귀하려는 시도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민혁명의 전통이 없는 일본은 격렬한 대중투쟁이 드문 국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59년부터 1960년까지 전개된 안보 투쟁만큼은 예외다. 1959년 3월에 사회당을 비롯한 노동조합과 시민 단체는 ‘안보 조약 개정 저지 국민회의’를 조직했고, 학생과 지식인층이 광범위하게 참가했다. 안보 투쟁은 1960년 5월과 6월에 절정을 이뤘다. 노동자・학생・지식인 및 주부들까지 모여 국회의사당과 수상 관저 밖에서 대규모 시위를 전개했다. 6월 4일에는 전국 445곳 560만 명이 데모에 참가했다. 가장 중요한 구호는 미일 안보 조약을 반대였지만, 단순히 조약 자체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시위가 격렬하고 광범위하게 전개된 이유는, 전쟁의 참상을 경험한 일본 국민이 다시 권위적이고 전쟁이 가능한 전전 체제로 돌아갈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불과 15년간의 신헌법 체제를 경험했지만, 시민들 사이에 민주주의는 더 이상 거스를 수 없다는 공감대가 폭넓게 존재했다. 1959년 말부터는 미쓰이(三井) 광산 노동자 127명에 대한 지명 해고로 촉발된, 미쓰이·미이케(三井ㆍ三池) 투쟁이라는 거센 파업 투쟁이 일어나 총자본과 총노동의 대결로 이어졌다.

신 미일안보조약은 날치기로 통과되며 성립되었지만, 결국 기시 내각은 정국 안정을 위해 물러나야 했다. 이후 자민당 수상들은 더 이상 헌법 개정이나 안보 문제를 정치적 쟁점으로 삼지 않았다. 일본 자민당 주류가 ‘보수 본류 노선(일본의 방위 부담은 미국에 의존해 최소한으로 억제하고, 경제성장에 집중)’을 택하게 된 이유는 1960년의 투쟁이 큰 교훈이 되어서다. 일본 시민들은, 비록 민주적 질서와 평화헌법이 위로부터 주어진 것이었지만 전전으로 회귀에 반대했다. 특히 사회당·공산당과 그 기반인 노동조합을 비롯한 시민사회 세력은 지난 15년간 빠르게 성장해 있었다. 자민당 정부는 민주적 질서인 신헌법 체제를 수용하며 경제 발전을 중시하는 정책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일본에서 미군정 통치는 이중적 성격을 가진다. 1945년부터 1952년까지 7년 통치의 전반기는 일본을 다시는 전쟁을 일으킬 수 없는 특수하고도 평화로운 민주주의국가로 재편하려 했던 뉴딜주의자들의 시도가 중심을 이뤘다. 점령 후반기를 통치한 미군들은 일본을 냉전 질서에 편입시키고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방벽으로서, 군대를 보유한 보통 국가로 되돌리고자 했다. 이 점령 통치의 이중성은 이후 보수-혁신이라는 자민당과 사회당 간 정치 대립 구도로 이어지며 ‘55년 체제’를 형성한다.

헌팅턴은 ‘일본 민주주의는 미군 주둔의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설명대로 미국의 직접 개입이 없었다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이 민주주의 국가로 이행했을지 여부는 논쟁의 소지가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일본 민주주의 역사에서 미군정 시기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우리는 좀 더 깊이 현대 민주주의 국가 일본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은 그 시작점이다.

정혜윤

국회미래연구원 부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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